– 믿음의 어머니 정영숙 권사(새사람 교회)
자식을 선교사로 파송한 부모가 믿음으로 선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도 전쟁과 테러 가 비일비재한 아프리카 오지로 보낸다면…. 파송 선교사 2만명을 돌파한 이 땅에서 아들을 홀로 내전 상태에 있는 수단으로 최근 파송한 믿음의 어머니 정영숙 권사(58)를 만났다.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는데, 제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노력했지만 게으른 삶이었고, 아름답게 살려고 했지만 덧없는 인생이 었으며,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 어떤 인생을 사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한 평생을 자아의 종노릇하며 속아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 자식을 통 해 선교적 삶을 이뤄가는 가족으로 인도하고 계셔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지난 3 월말에 올해 서른 살의 아들을 아프리카 수단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파송교회도 없고, 파송 선교단체의 선교사관리체계도 이제 마 련돼야할 것 같고, 오직 주님만 의뢰해야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게 감사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생후 9개월째 6kg으로 패혈증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 아들이 장 성하여 이제 열방의 영혼을 살리는 선교사로 떠났으니까요. 당시 주님께 매달렸죠. ‘하나님, 살려만 주신다면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도 잘 모르던 시절에 절 박하게 토해내던 그 기도를 실제 되게 하신 것이지요.”
– 그동안 권사님의 삶을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믿음의 여정을 듣고 싶습니다. “유년시절 교회를 다니다가 독실한 불교 집안의 남편과 결혼한 뒤 예수님을 떠났습 니다. 그런 일상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다가 전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경험 하게 됐습니다. 84년 9월, 전국에 엄청나게 비가 내렸는데 서울도 예외가 아니었죠. 세검정 뒷산의 산사태로 축대가 무너지면서 집이 흙더미에 덮여버리게 된 것이죠. 동 네에서 가장 튼튼한 집으로 소문났던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함 께 잠자던 3삼매 중 2명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지요. 그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 신 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두려움이 원인이었어요. 슬픔을 극복하려 고 미친 듯이 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신학공부를 하게 되고, 대형 교회의 전도사로서 청년사역을 맡았습니다. 사역한지 1년쯤 지날 무렵, 육신은 극도 로 쇠약해지고 지쳐버렸습니다. 병원에서 자궁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정말로 절망적 인 상황이 펼쳐지더군요. 92년에 주님이 극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건지게 됐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며 삶의 한계점에 있을 무렵, 주님이 복음학교란 곳으 로 인도해주셔서 십자가 복음 앞에 직면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지요.”
– 복음을 만나 선교적 삶을 산다는 것이 실제 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까 생각됩니다. “결혼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찬불가를 부르며,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게 성실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도 동일한 사고방 식으로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진리를 잘 몰랐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 자신을 불쌍한 여자로 여겨 자기 연민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매일 울었습니다. 기도 제목이 늘 소원성취와 문제해결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식 성공이 기도제목의 전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아를 추구하는 인생이었죠. 그리고 죄의 열매를 거 두지 않으려고 온 몸을 내던져 가며 열심히 교회 일을 했습니다. 뒤돌아보면 ‘자아 죽 이기’ ‘자아 길들이기’ 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갈2:20말씀을 외우면서도 어디에 서 어떻게 죽는 것인지도 몰랐죠. 그러다 완전한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고, 내 열심으 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이미 주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주셨다는 사실을 알 게됐죠. 그리고 내 자신이 선교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복음선교관학교를 다니며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갔죠. 그리고 6개월간의 공동체 훈련인 복음사관학 교에도 참여하면서 존재적 절망을 더욱 실감나게 경험하게 됐죠.”
-훈련기간은 어떠셨나요? “최근 창세기 묵상 중 뱀을 간교하다고 하는 말씀을 봤습니다. 그 간교라는 단어 의 의미 중에 ‘영리하고 멋지다’라는 뜻이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을 많이 했어요. 어떤 성경 말씀을 여러 지역 방언으로 묘사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그 태도 뒤에는 제 자신을 높이려는 숨은 의도가 있 음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요. 이밖에도 믿음의 길을 걸으며 제 자신에 대한 다 양한 한계를 경험하면서 더욱 나를 깨뜨리게 됐죠. 결국 복음사관학교를 수료자 로 마치지 못하고 참가자로 마쳐야 했지요.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게 은혜 였습니다. 만약 수료했다면 어쩌면 그게 저의 훈장이 되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 기며, 저를 교만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죠.”
–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지난 3월말에 아들이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가족과 함께 아들을 인천공항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 15분전이었어요. 다음 날은 저의 집에서 느헤미야52 일 기도로 열방을 주님께 올려드리기로 한 날이었어요. 자식을 보내고 감상에 젖 을 시간도 없었죠. 자정부터 남편과, 아이 둘을 잃은 사고 이후 기적적으로 아이 를 가져 주님이 허락해주신 딸과 함께 셋이서 24시간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기 도시간을 갖게 된 거죠. 물론 다음날 믿음의 동역자 10여명이 우리 집을 방문, 은 혜 가운데 기도의 능선을 구축할 수 있었어요. 이 시간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습니다. 아들은 선교 현장에서, 저는 기도로 열방을 사수하는 땅끝에 서 있음을 실감했던 순간이었죠.”
– 선교사로 떠난 아들은 어떤 분인가요. “정말 명품 옷만 입히고, 귀하고 곱게 키웠어요(웃음). 그런데 선교지로 갈 때 그 런 옷은 가져갈 수 없잖어요. 그래서 아들에게 이런 옷들은 다 어떻하냐고 한마디 했죠. 그랬더니 아들이 ‘좋은 옷 입혀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쁜 선교사로 만드 셨잖아요.’라고 웃으며 한마디 하더군요. 선교지에서 외로울 때 보라고 장롱 속에 깊어 파묻어두고 거의 꺼내보지도 않았던 앨범을 뒤져서 가족사진을 꺼내줬어요. 그런데 떠난 아들 방에 가보니, 그 가족사진과 평소 지갑에 넣고 다니던 가족사진 까지 모두 빼놓고 갔더군요.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아들아, 너는 어떻게 하나님 을 만났길래 이처럼 철저하게 이 땅의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길 수가 있었 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저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아들 아 너는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나는 이곳 땅끝에서 기도한다’는 심정으로 기도 의 자리에 섭니다.”
– 믿음의 고백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끝으로 한 말씀으로 정리해주세요. “사실, 인터뷰 자리에 오기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서는 것 같았습 니다. 또 이런 자리에 서면서 두려웠습니다(제가 뭐가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라고 스스로 높아진 자가 될까봐…). 그러나 이제는 속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원숙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믿음의 끝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하기로 할 때 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우실 주님을 의뢰할 뿐입 니다. 이제 주님이 부르신 그곳에서 예배자로 기도자로 설 것입니다. 마라나타!”
<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