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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근현대 한국의 아픔과 기쁨을 오롯이 품다

▲ 초량교회 전경 모습. 나무위키 캡처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부산초량교회

선교를 목적으로 부산을 찾았던 선교사들은 1889년 8월 게일(James Scarth Gale, 독립 선교사), 1890년 하디(Robert A. Hardie,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진료하다가 1891년 4월 14일 부산에 정주하면서 사역), 1890년 4월 4일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호주장로교), 1891년 9월 베어드(William M. Baird, 미국 북장로교) 등이다. 그중에 게일과 하디는 1년 정도 부산에 머물다가 서울과 원산으로 임지를 옮겼고, 호주 장로교회의 데이비스는 부산선교를 위한 비전을 품고 왔지만, 도착한 다음 날 순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호주 장로교회가 조선을 선교하기 위한 선교사들을 파송으로 이어졌고, 그 첫 열매가 지금의 부산진교회로 남았다.

데이비스가 순직한 다음 해 1891년 4월에 호주 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부산에 도착해서 부산진에 선교부를 설치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베어드가 도착해서 부산역 앞 언덕에 자리를 잡은 곳이 부산역 건너편 언덕의 영주동이다. 이곳에 선교부를 설치한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공동체가 지금의 초량교회이다. 이렇게 볼 때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부산진교회는 훗날 한국장로교회가 분열하면서 예장통합 교단에 속하게 되었고,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설립한 초량교회는 예장합동에 속하게 되었다.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부산에 첫발을 디딘 베어드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현재 초량교회가 있는 곳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현 코모도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영선현(瀛仙峴)이라고 하는 곳인데, 그곳의 세 필지 땅을 미국 영사관의 도움으로 외국인 거주지로 매입할 수 있었다. 베어드는 그곳에 1892년 4월 선교관을 지으면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건물로 이주했다. 6월에야 완성되었고, 그 선교관에서 7월 5일 첫째 딸 낸시 로즈(Nancy Rose)를 얻었다. 하지만 2년 후 뇌척수막염으로 그 딸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이 선교관 사랑방을 중심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한편 독립 의료선교사로 부산에 온 캐나다 사람 하디(Robert A. Hardie, 후에 남 감리교회로 이적해서 목사가 됨)도 베어드의 사역에 협력했다. 하디는 의사로서 의료시설이 없었던 부산에 1891년부터 정주하면서 진료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베어드에 의해서 영선현교회가 시작될 무렵인 1892년 11월 원산으로 임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하디와 함께했던 소수의 한국인들이 베어드가 시작한 영선현교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영선현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오늘의 초량교회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사랑방에서 시작된 작은 공동체는 지금의 초량교회로 그 역사를 잇고 있다. 초기에는 영선현교회, 1902년 영주동교회로 불리다가 3.1만세운동 이후 초량 삼일교회로 불리기도 했다가 1922년 현재의 자리인 초량동 1005번지 대지를 매입하여 이전하여 지금까지 초량교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기독교 역사를 잇고 있다. 그러나 부산 초기 선교 역사, 특히 처음 설립되는 교회 역사에 대해서는 이론(異論)들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세히 다룰 수 없지만 각 교회가 확인하고 있는 설립 연도를 기준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초량교회 설립과 관련해서 소개한다.

부산 지역의 선교 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있지만 초량교회 역사에 중심이 되는 인물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베어드이다. 그는 부산선교를 위한 거점을 영선현에 마련한 다음 작은 공동체가 모임을 가지면서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계획을 세웠다. 몇 년이 지나면서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부산을 벗어나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전도가 확산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1896년부터는 순회 전도를 위해서 1년 중 7개월 정도는 부산에 있지 않고 인근 지역을 방문하면서 전도하는 일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순회 전도를 시작한 1896년에는 279일, 즉 9개월 넘게 전도 여행을 했다. 당시 그가 걸어서 다닌 거리만 약 1,600킬로미터라고 하니 얼마나 고된 일정이었을까. 당시 그의 여정은 대부분 두 발로 걷는 것이었으니 대단한 수고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순회 전도를 위한 발걸음은 서상륜, 고윤하 같은 조사들과 함께 경상지역은 물론 호남지역의 일부까지 이어졌다. 부산을 기점으로 해서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마산, 경주, 그리고 호남의 전주, 목포, 남원, 이어서 충청도의 공주와 경기도 수원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시간이 흐른 다음 이러한 그의 발걸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은 그가 가는 지역마다 복음의 열매들이 맺히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각 교회들을 통해서 또 그 지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록 그는 부산에서 사역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노고를 통해서 부산 선교의 초석이 놓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897년 10월 2일 베어드가 평양 선교지부로 임지를 옮긴 이후 부산 선교지부에는 다른 선교사들이 와서 그가 진행해 온 사업을 이어갔다. 그중에도 북장로교회의 어빈(Charles H. Irvin)을 비롯해서 21명의 선교사들이 부산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 부산을 찾아왔다. 어빈은 의료 선교사로서 부산과 영주에 전킨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을 건립하여 이 지역의 환자들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전킨은 한국 선교를 위해서, 특별히 병원 건축비를 후원한 전킨 목사를 기념하기 위한 명칭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을 치료하고 있는 선교사 이름을 따라서 어을빈(어빈)병원이라고 불렀다. 이 병원은 부산의 제중원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 병원은 실제로 부산에서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빈 선교사를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가 필요로 하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을 했다. 이러한 수고는 영선현교회를 비롯해서 부산 선교지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부산 시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미국 북장로교회 부산 선교지부에서 시작된 영선현교회는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선교지부 건물에서 모이는 것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독립된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1902년 영주동에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동시에 교회 명칭도 영선현교회에서 영주동교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이내 예배당이 비좁아질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결국 1922년 호주 장로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매카이(James Hannah Mackay) 선교사로부터 이관을 받아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현재 초량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이때부터 초량교회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역사를 잇고 있다.

20241013 Choryang Church 1
tgckorea.org

한편 초량교회는 1912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한국인 담임 목사를 청빙하게 되는데, 한득룡 목사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1907년 장로교회 목사가 처음 장립된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빨리 담임 목사를 청빙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초량교회가 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15년에는 정덕생 목사가 2대 담임으로 청빙 되었는데, 그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고베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정 목사가 목회를 하는 동안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항일운동을 지원하다가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정 목사는 백산상회 주인인 안희제와 윤태현 집사, 윤현진 집사를 도와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는 관계로 9명이 체포 투옥되는 과정에서 그도 체포되어 1922년 두 주간 정도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과 연계해서 초량교회는 영남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의 거점 역할을 함으로써 부산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1921년 이 교회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때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모아서 건축에 동참하는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일시적이지만 ‘초량 삼일교회’로 부르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초량교회가 부산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과 함께 자신들도 예배당 건축에 기여하고 싶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1926년 3대 담임으로 28세 때 청빙 된 주기철 목사는 부산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인 초량교회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목회자로서 책임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담임으로 취임하자마자 제직회와 구역을 개편하고 전도에 전력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진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에 들어서면서 사례비를 낮추고 전도부인의 사례도 낮추어 실행하면서 주 목사의 사모(안갑수)도 친정에 갖고 있던 논 6천여 평을 매각하여 구제 사업에 충당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는 일을 주도했다. 경남노회에 정식으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제출했다. 당연히 주 목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초량교회 성도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1931년 마산 문창교회로 임지를 옮기면서 이약신 목사가 담임으로 청빙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는 주 목사가 문창교회로 이임했음에도 초량교회를 감시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물론 초량교회 성도들도 40여 명이 비밀리에 모여서 기도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서 지원하는 일은 계속했다. 그런 사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서 직접 관련된 성도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처럼 초량교회는 부산지역 독립만세운동과 일제에 저항하는 근거지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 사회는 물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한상동 목사가 청빙 되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한 죄명으로 7년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해방 이후 초량교회와 부산 경남지역의 교회들을 규합했다. 다만 그는 출옥 성도의 신분을 앞세워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고신 교단을 만드는 주역으로 지지자들을 이끌고 1952년 삼일교회로 분립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초량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 고신 측 분열의 직접적인 아픔을 체험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함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서울에 있던 정부까지도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피난해 왔다. 초량교회가 있는 위치가 부산역 바로 앞이거니와 부산항도 지척인지라 피난민들은 자연스럽게 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이때 초량교회는 밀려드는 피난민을 품어야 했고, 일정 기간 피난민 교회들과 함께 예배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피난을 간 성도들과 담임 목사인 김치선 목사가 초량교회에서 합동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피난 생활을 하도록 했다. 휴전이 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부산은 차츰 평정을 되찾았지만, 많은 피난민이 정착하는 어려움과 혼란도 감당해 내야 했다.

이렇게 초량교회는 단지 북장로교회 선교지부에서 시작된 하나의 교회 이상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모든 아픔과 기쁨을 품고 있는 교회이다. 물론 부산 지역의 또 하나의 모교회로서 역할과 위치를 지켜오면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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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교회는 이러한 역사와 사건, 인물, 그리고 관련된 사료들까지 한자리에 모아서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2022년 초량교회 내 베어드관 2층에 ‘초량교회 역사관’을 새롭게 만들어 주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날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글 이종전 |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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