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죄인으로 전도하라

Unsplash의 Arifur Rahman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 4:29)

변증은 제외하고라도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모델로 하는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가? 아마도 최근은 아닐 거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그녀의 이야기보다 더 뛰어난 복음 전도 모델은 있을 수 없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대부분의 가르침이 그녀의 증언(preaching) 내용보다는 그녀의 과거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을 만난 그녀를 두고 흔히들 이런저런 추측을 쉽게 하는데, 창녀나 간통녀로 낙인찍는 게 일종의 전형이다. 하지만 섣부른 추측은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요한의 서사에서 명확히 드러난 사실을 얼마든지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녀의 증언이 마을 전체의 복음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요 4:30-42).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 대다수가 평생 전도한 것보다 더 많은 영혼을, 그것도 단 하루 사이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거까지는 없다. 도리어 그녀로부터 유배지에서 선포되는 능력 있는 변증의 사례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면 된다.

유배는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이다. 아담이 인류를 죄와 파멸에 빠뜨려 창조주와의 교제에서 우리를 분리한 이후로 이 세상은 유배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척이나 반대를 통해서 타락이 가져온 유배의 하부 형태인 문화적 유배를 경험한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방식에 반대하는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살았듯이, 오늘날 교회도 문화적 유배에 직면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복음 메시지를 향한 시선은 깊은 회의주의 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상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배된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단순한 생존 또는 후퇴가 아니다. 복음의 선포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를 불쾌하고 믿기 어렵게 만드는 서구의 깊은 문화적 변화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런 어려움을 인식한 조슈아 차트로의 말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 비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상대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안다는 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 숱한 오해 속에서 사회 변두리에서 문화적 유배자로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녀의 변화는 지역 사회에 희망과 기쁨을 강력하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변증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한낮에 우물가에 혼자 있었다. 왜 그녀는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나타났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신을 멸시하는 마을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드럽게 밝히셨듯, 그녀에게는 이전에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남편이 있었고, 따라서 평판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연이은 결혼이 이혼, 죽음, 간통 또는 이것들의 중첩 때문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고통, 죄, 그리고 고난의 거친 바람을 견뎌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유배가 주는 고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예수님은 단지 자신의 존재만으로 그녀의 온 삶의 궤적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놀라운 만남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요한은 가장 먼저 배경이 내포한 깊은 의미에 주목하도록 한다. 모든 일이 우물에서 일어났다. 성경의 여러 족장이 (또는 그들의 사자들이) 외국의 우물가에서 미래의 신부를 만났고, 여인들은 만남이 가져다준 기쁜 소식을 갖고서 가족과 마을로 돌아갔다(창 24:28; 29:12; 출 2:18-19). 요한이 그리는 예수님은 타지의 우물가에서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스캔들에 빠진 여인에게 찾아와 구원의 은혜로 그녀를 만나 “영과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인도하는 참된 신랑의 모습이다(요 4:24). 이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모습이다.

요한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경계를 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물가에서 단둘이 있는 동안에 여인에게 말을 거는 예수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화적 단층을 뛰어넘는다. 그녀의 성별은 여성이고 예수님의 성별은 남성이다. 여인의 민족은 사마리아인이고 예수님의 민족은 유대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한다고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단적 혼혈로 보았다. 만약에 ‘절제된 표현’이라는 학문이 있다면, 당신은 단지 그 두 집단이 분열되었다고 말함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을 거다. 분열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두 집단 사이에 적대감은 깊었다. 증오는 쌍방향이었다(눅 9:51-54).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녀의 상태에 깊이 공감했다. 예수님도 그녀 이상으로 목마르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비롭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영접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은혜의 움직임에 매우 친숙하다. 우리의 깨어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알고 또 찾으신다. 거세게 불어오는 문화의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자비라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깊은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존중하셨고,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여인은 대담한 변증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요 4:29).

이런 식의 대담하고 공개적인 선포는 1세기 여성에게 매우 이례적이다. 게다가 평소에 이웃의 평판이 좋지 않았을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사마리아 여인의 담대한 증언은 우리가 때때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여기는 진실 하나를 가르쳐준다. 변증의 핵심은 간결한 답변도 아니고 상대가 반박할 수 없도록 하는 주장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도무지 입을 열어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경외감이다.

변증과 노출

예수님과의 만남은 존엄성과 자비뿐만 아니라 노출을 초래한다.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런 노출이야말로 신성한 자비로움에 따라오는 결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환자의 자가 진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의사처럼, 예수님은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나의 깨어진 상태와 죄성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여인의 비밀을 언급했을 때, 그 여인은 과연 얼마나 발가벗겨진 것같이 느꼈을까? 요한복음 4:16-18은 그 순간을 포착한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그녀가 여러 번 결혼한 이유가 무엇이든, 폭로의 요점도, 또 예수님이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 선언에도 변함이 없다(18절).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과 개인사를 깊이 들여다보신다. 그런 다음 그녀의 상처와 죄악을 자비로운 빛 가운데로 이끄신다.

우리는 과연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나를 바라보시도록 하고 있는가? 사마리아 여인이 체험한 자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증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주님 앞에서 내 모든 약함이 드러나지 않는 한 은혜를 경험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가 일으키시는 자비로운 노출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을 대화하기 위함이다(19-24절).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도록, 자신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도록 이끄셨다(25-26절).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여인의 회심 그리고 그녀의 선포에 변화되는 마을 사람들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한다(39절). 여인이 구주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니라 그녀의 죄를 폭로하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 때문이었다. 폭로의 결과는 두려움이 아니라 뜨거운 흥분이다. 그녀는 물항아리를 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달려간다.

G. K. 체스터턴은 상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쁨이야말로 … 그리스도인의 거대한 비밀이다”라고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을 신실한 변증의 실천자로 생각하면서, 나는 체스터턴의 격언을 리믹스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쁨이야말로 기독교 변증의 거대한 비밀이다. 초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준 능력 있는 전도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쁨에 취해서 그녀는 전도사의 사명을 수행했다.” 예수님을 만난 그녀에게 진리와 은혜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그녀는 증인이 되어 즐거운 수확을 일구는 일꾼이 되었다. 한때 수치심으로 침묵하던 그녀가 복음의 기쁨으로 인해서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회의에 빠진 세상에서 만나는 진정성

우리 시대에 진리를 위한 공간은 거의 없지만 나의 진리를 위한 공간은 충분하다. 이러한 변화는 절대적인 것의 제거가 아니라 단지 위치의 변화로 나타난다. 진리는 이제 진정성의 문제가 되었다. 진리는 이제 우리 밖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는 바로 그 체험에서 진리가 나라는 사람 밖으로까지 흘러나온다. 그러한 관점은 불안정하고 궁극적으로 해롭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특히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필요가 없다. 객관적 진리를 아예 포기하고 주관적 진정성을 신성시하는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할 말이 있으니까. 예수님은 객관적으로도 진리이면서 또 개인적으로도 진짜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문화가 중요한 시대에 신실하고 유익한 변증을 하고 싶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객관적인 측면과 동시에 개인적인 측면까지를 함께 감안해야 한다. 문화와 사회 또는 친구와 가족이 진정성을 신성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진리와 은혜이신 분에 대한 매일의 진정한 체험에서 우러난 증언을 할 수 있다(요 1:14). 베드로는 유배자들에게 어둠에서 빛으로 부르신 분의 송영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고 촉구한다(벧전 2:9). 이것이 바로 유배의 삶에서 필요한 변증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보유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실재를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러한 유배자의 송영(exilic exaltation)의 훌륭한 모델이다. 그녀의 증언은 강력하고 단순하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요 4:29). 이것은 그녀의 개인적 체험이다. 진실이며 경외심에 뿌리를 둔 이야기이다. 그녀의 증언은 반박할 수 없다. 어떤 남자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다 말했다. 그것은 객관적 진실일 뿐만 아니라 그녀 개인의 진실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두 가지를 다 선포해야 한다. 적대적인 상황이나 회의적인 관계에서도 우리는 진정성이라는 각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이 내게 행하셨던 일, 그리고 지금도 나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하고 계신 일을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선함과 진실성에 대해서 불신자의 깊은 회의가 넘치는 시대에, 우리의 변증론은 이러한 나-너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행한 일을 간증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에서도 행하실 수 있는 일을 고려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우리는 불신자를 그리스도와 연결할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체험의 언어를 표현하는 데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를 희망, 놀라움, 겸손, 경외감으로 떨리게 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변증이 가진 나-너의 형태는 어떤 측면에서 집 바닥과 비슷하다. 초인적인 도약 능력이 없다면, 누구나 1층에서 2층을 가기 위해서 계단을 이용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1층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이 말은 성육신에 대한 간증이다. 인간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예수님이라는 진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왜 복음이 복된 소식이고 진실하며, 의미 있는지에 대한 선포이다.

때때로 우리는 처음부터 2층에서 시작하는 기적을 만나기도 한다. “기독교가 왜 그렇게 좋은지 한 번 더 말해줘.” 이렇게 묻는 친구도 있다. 또는 바울의 경우처럼 누군가가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1층에서 시작해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거기가 바로 1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변증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1층 증언” 또는 나-너 형태의 변증은 예수님에 대한 필수적이고 지속적인 의존을 요구한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장벽은 교만이다. 이러한 유형의 변증은 대단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피할 길이 없을 정도의 취약함을 내포한다. 예수님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은 자기 비난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송영이다. “와서 이 예수를 보세요! 당신은 내 삶의 모든 문제, 죄, 소문을 알고 계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여전히 나를 껴안고, 내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줬습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을 그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당신의 도덕적 문제까지 꺼낸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사례에서 배우려면, 우리의 변증은 굴욕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지를 가지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치유하시는 그분의 은혜 외에도, 나는 당신이 얼굴을 붉힐 만한 결점과 결핍, 그리고 죄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변증은 내가 가진 공로에 의존하는 페르소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대신에 내 삶을 구속하고 변화시키는, 십자가에 못 박힌 구주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몇 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절친 한 사람과 함께 팀 켈러의 변증 고전, The Reason for God(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을 읽었다. 나는 설레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 책을 두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좋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주제가 은혜로 바뀌었고, 친구는 자신과 내가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용서가 필요한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순간 나는 이제 모호한 기독교적 일반론에서 “나는 죄인이다”라는 진짜 세상이 드러내는 더 자세한 현실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때 그에게 고백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어떻게 일을 망쳤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상처입혔는지, 어떻게 차마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말해야 했다. 그 순간은 내가 지은 죄악의 구체적인 고백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수치스러워도 하나님의 은혜는 높아져야만 했다.

그런데 목이 꽉 막힌 것 같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교만함이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몇 가지 흔한 말을 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 여인과 달리 깨어진 상태의 나 자신이 드러내는 “내가 한 모든 일”의 본질을 지적할 수 없었다. 나는 구체적인 내 진실을 말하는 대신에 일반적인 진실을 말하는 데서 그쳤다. 그 결과 나의 증언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변증의 영성을 품으라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준 증언의 패턴을 따를 때, 우리는 기쁨, 겸손,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진정성이 스며든 변증 영성을 받아들인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체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분에게로 인도하도록 자극한다. 친구와 가족을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써,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들에게 그분을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그들이 2층으로 올라가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방송한 “와서 보라”는 명령에 동참한다.

그녀의 초대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음성의 메아리(요 1:39)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초대했다(46절). 예수님을 생각하는 즐거운 공간인 1층으로 초대함으로써, 우리는 첫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추구하신 변증의 전통에 동참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 두 번째 단계는 개인적인 간증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분이 그리스도이실까?”(4:29). 우리도 “나의 진실” 그리고 “나-너” 형태에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그 진리”를 고려하도록 돕는 방향, 즉 “나-너-그리스도 운동”이라는 형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건 한마디로 2층으로 올라가는 움직임인데, 그건 내가 체험한 예수님에 대한 간증에 이어서 따라오는 열린 질문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그리스도가 기도를 통해 어떻게 나를 도와주셨는지를 친구에게 간증할 때, 그가 단지 내 체험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를 만든 진리와의 관계를 그 친구가 자신의 삶에도 고려하도록 초대하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네 문제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또는 “마음을 열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배우지 않을래?” 그런 질문은 그리스도라는 실재를 보여주고, 또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간단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 결과 그들은 믿음과 신뢰로 나아가는, “와서 보라”는 여정에 동참할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변증 증언에는 두 단계가 있고, 중요한 건 순서이다. 회의적인 시대일수록, 인간적으로 말해서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진정 어린 복음 증언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을 닫아버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1층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게 반드시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느린 과정만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의 시작점으로써 개인적 변증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증언에 두 단계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반응에도 두 단계가 있다. 전도 대상자는 우리의 체험을 믿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험을 해야만 한다.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간증을 믿었던 건 그녀가 진실했고 또 행복했으면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까지 드러냈기 때문이다(39절). 그런 다음에 궁극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그 만남은 결국 믿음으로 이어졌다(42절). 1층에서 시작해서 2층에서 끝난다. 즐거운 간증에서 시작해서 구원의 기쁨으로 끝난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할 때, 문이 열려 듣는 이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전혀 논쟁적인 변증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뿌리를 둔 변증 영성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누리는 생명을 체험하고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빚어가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증언, 그런 변증에 살아 숨 쉬는 맥박이 있을 리 없다.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바로 이 사실이 유배의 삶을 살던 여인이 우물가에 와서 생명을 만난 이야기, 큰 기쁨에 싸여서 자신이 예수님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게 되었다고 외친 그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이다. [복음기도신문]

출처: Evangelize Like You’re a Sinner 

클로드 아초 Claude Atcho | 클로드 아초는 Church of the Resurrection(Charlottesville, Virginia)의 목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Reading Black Books: How African American Literature Can Make Our Faith More Whole and Just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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