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수고와 우리가 생각하는 수고가 다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1차적인 설교 목적입니다.
수고하는 상황이 있고, 목적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목표를 두고 달려갈 때 왜 수고해야만 하는가! 수고의 결과가 왜 천차만별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가치를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은 수고의 진심을 원하게 됩니다. 수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고, 하늘의 역사가 실제로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인지 알게 되어, 그것을 소원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갈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수고한 일에 대한 결과물이 선순환을 일으켜 또 수고하게 하고 또 기쁘게 하고 또 사랑하게 만들고 함께 더불어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했습니까? 더불어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우리 수고의 결과는 대부분 욕심을 생산해 냅니다. 자기애, 자기 성취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할애하게 합니다.
수고는 우리가 살아가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가치로 수고를 보면, 결과로서 수고가 있습니다. 수단과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수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저주의 결과로 수고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고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다스릴 것이 있었습니다. 온 세계에 충만했습니다. 함께 더불어 지낼 것이 온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기쁨으로 잘 관리하면 충분했습니다. 아름다운 잔치가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뒤, 에덴에서 쫓겨난 뒤에는 달라집니다.
성경에서 수고는 결과의 개념입니다. 저주 받아서 고통스러운 결과가 수고입니다. 고통이 임하는 내용이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히브리어로 ‘아말’입니다. ‘저주 받아 고통스러운 열심’입니다. 직역하면 ‘지긋지긋한 노력이 수반되는 열심’입니다. 수고는 저주받은 근거입니다. 고통스러운 산물입니다.
단순히 연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나이 먹음은 무엇인가 성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룬 것이 있고 업적이 있고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연수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한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받은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영적으로 무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사는 골짜기에서 성공한들, 업적을 남긴들, 그것은 나병환자 골짜기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합니다.
해 아래에서 아무 유익함이 없다고 합니다. 이룬들, 된들, 가진들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 골짜기에서 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고는 ‘아말’, 저주 받아서 고통스럽게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수고하고 애쓴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수고하고 애쓰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보내는 영광이 여러분들에게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세우려고 수고합니다. 성을 지키려고 수고합니다. 가문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일으키고, 한 나라와 민족을 융성시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수고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으신다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가문이 일어서고 나라가 융성해져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무언가 세운다는 것은 그전에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가 무엇에 치중하고 무엇을 막아야 강성해질까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능력이고 통찰입니다.
강력한 힘과 강력한 통솔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자원이 있어야 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뤄야 합니다.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큰 통찰에 우리가 속아 넘어갑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일으킬 만한 내용이 보일 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됩니다. 에덴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 사니까 기쁠 수 없습니다. 기쁨의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쫓겨난 뒤 하나님 보란 듯이 돈으로, 자녀로, 성공이나 이룸이나 자아실현으로 행복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시편 127:1~2절에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집이 무너지고 성이 무너져서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행복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자복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데, 인간은 다시 스스로 세우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목회도, 여러분의 가정도, 삶의 현장도 그렇습니다. 그것만 고치면 행복하고 잘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녀, 남편, 아내, 사업장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이것만 세워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그것을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표제는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갈 때 불렀던 시입니다. 성전을 통과하려면 번제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편 127편은 번제단을 통과할 때 불렀던 찬송시입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죽을 때 우리는 내가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주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입니다. 돈으로 행복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애씀이 죽고 하나님만 남았다는 실제 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번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살에 왕이 된 솔로몬에게 얼마나 많은 조바심이 있었겠습니까? 사역자도 처음에는 굳센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 바라보겠다고 다짐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언가 잘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는 일을 잘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잘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을 공급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잘해서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무 살 청년이 왕이 되었다면 솔로몬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만약 하루 한 마리씩 제물을 잡았다면 3년을 제사 드린 셈입니다. 3년을 허비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솔로몬이 만일 3년간 제사를 드렸다면, 솔로몬은 국정을 다스릴 마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번제만 드리기도 버겁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하루종일 드려야 합니다. 제물에 흠이 있는지 살피고, 내장을 꺼내고 어떤 것은 말리고 어떤 것은 태웁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또 하나님의 생각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번제는 사실상 하루종일 걸립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왕이 됐을 때 왕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치중한 것입니다. 저는 그 솔로몬을 닮고 싶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이 깃들게 되면 불안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 현장을 3년간 떠나 있어도 괜찮을까요? 책상이 바뀔 것이고 교회는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했습니다. 왕이 되어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고 백성들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마음도 생겼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어려도 그렇고, 다 커도 부모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같습니다. 솔로몬이 천 일 동안이 아니라 한 번에 천 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같은 의미입니다.
왜 일천번제를 드려야 했을까요? 솔로몬의 마음이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도 염려가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염려 때문에 무언가를 하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죽이기 위해, 그 염려를 죽이기 위해 번제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데, 자신에게 염려가 들어오고, 이것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을 하면 헛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것을 번제로 죽인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 표정을, 저 언어를, 저 이기심을, 저 믿음 없음을 어떻게 바꿀까 하는 염려가 끊임없이 들어옵니다. 무엇인가 해주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을 하면 헛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시면 안 돼” 그런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염려를 죽이기 위해 천 일 동안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제가 무언가 한 번 잘못하면 죄의식의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나의 믿음을 갖추기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죄의식 하나 회복하는 것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생겼습니다.
솔로몬이 믿음이 있었지만 일천 번 죽었고,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날마다 죽는 것이 정상이구나! “하나님, 제 마음에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이 들어와서 저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마다 저는 죽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도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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