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 잠 4:8

[특별기획] 사무치도록 그리운 땅 양양에 가다

▲ 사진 : Rachel McDermott on Unsplash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5)

그날 오후 나는 대구를 거쳐 일단 단양으로 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하룻밤을 지내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말씀드렸다. 반드시 이 양과 결혼할 것과 1연대를 찾아 현역 군인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1951년 9월 초순, 이미 추석명절도 지났다. 아침 일찍 단양을 출발해 원주역에 도착해 헌병 검문소에서 내준 군용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대관령 정상에서 멀리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지난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그 기억들은 옛 일일 뿐이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절망의 위험이 닥칠 때마다 기적을 베푸시고 보호해 주신 순간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분명히 깨달았다. 예수님을 믿어야지 하면서도 왜 하나님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연단을 허락 하셨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지나간 일들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어느덧 군용차는 목적지인 강릉에 도착했다. 강릉 시내에서 다시 군용차를 이용해 양양으로 달렸다.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과연 이 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나를 단념하지는 않았을까. 많은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양양이 가까워지니 초조감이 더해졌다. 군용차가 양양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 월리에서 차를 세우고 이 양과 가까운 친구 ‘공영자’ 양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마침 집에 있던 그녀가 나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조 하사님,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는 조 하사님이 잘못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됐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겠습니까. 봉실이 잘 있겠지요?”
제일 궁금한 소식부터 물었다.
“네, 잘 있습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듣고 싶은 소식을 일단 들었으니 됐다.
급하게 인사를 하고 남대천 다리를 건너 이 양 네 집으로 달음박질 쳤다. 집 앞에 도착하자 옆집 양숙 엄마가 나를 확인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에구머니 조 하사가 왔어요.”

순간 이 양 어머니와 이 양이 맨발로 뛰쳐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우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두 말문이 막혔는지 손만 잡고 아무런 말을 못했다.
옆에 앉은 양숙 엄마가 말했다.
“나는 조 하사가 꼭 살아올 줄 알았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는 이 양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마음 변치 않고 기다려준 이 양이 있었기에 제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옆에 앉아 계시는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못하고 손만 잡아주셨다. 성격이 급한 양숙 엄마는 내쳐 물었다.
“조 하사,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 왔나.”
“예, 인민군에게 붙잡혀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중대장 얘기가 맞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제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같이 있던 중대장님과 전우들이 궁금합니다.”
그들의 소식을 물었다.
내가 인제군 기림면 고지에서 식량을 구하러 떠난 후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자 중대장 일행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방향을 바꿔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인민군에게 발각된 줄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 후 중대장 일행은 4일 만에 아군에 복귀했고 중대장과 부관이 직접 이 양 집에 찾아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조 중사는 우리를 위해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조 중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 후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방문하여 이 양을 격려하며 재정적인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고 들려줬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또 양숙 엄마가 입을 열었다. 인민군에게 포로가 됐는데 어떻게 살아왔느냐며 믿을 수가 없다고 묻고 또 묻는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한 번에 다 할 수 없지만 두고두고 말씀드리겠다고 진정시켰다. 바로 그때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이미 서산에 해가 질 무렵이었다. 집 아래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중대장 지프차 소리같이 들려 힐끔 이 양 얼굴을 쳐다봤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우리 중대장님 지프차 소리 같네요.”
이 양도 나와 같은 예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대장이 말채찍을 흔들면서 올라오고 뒤에 윤 부관이 따라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감이 맞았다.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중대장님, 제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중대장님도 나를 덥석 안으며 유난히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동안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날 조 중사를 적지에 두고 나만 살아남아 이때까지 죄인 된 심정으로 지내왔다. 이제는 헤어지지 말자.”
힘주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조 중사는 연락병이기 전에 나의 호신을 최선을 다해 돌봐 준 형제 같은 동료입니다. 함께 지낸 동안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장병들의 계급 승진이 있었는데 나는 실종자로 상부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계급 승진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중대장님은 섭섭해 하였다.
“중대장님, 내게 계급이 문제입니까. 참을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의 시련을 이겨내고 이렇게 중대장님 앞에 서 있으니 저야말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보충대에서 만난 권충일 상사가 적어 준 몇 사람의 명단을 윤 부관에게 전해줬다.
“이 친구들도 무사히 빠져 나왔구나.”

그는 안도했다. 그들 일행은 9사단에 차출돼 백마고지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했다. 중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지켜봤다. 끝으로 중대장님은 나와 이 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조 중사는 오늘부터 특별휴가를 명한다.”
작별인사를 하고 전선으로 길을 떠났다.

특별휴가는 일주일이 주어졌다.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다. 기적을 이룬 하나님의 작품이다. 어찌 이러한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사랑하는 이 양과 중대장님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에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실화였다. 이런 사연들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자서전을 쓰게 된 동기가 됐다.

중대장님 일행을 배웅하고 돌아와 양숙 엄마를 비롯한 식구들은 밤이 깊도록 드라마같은 나의 탈출담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이 양에게 ‘당신’이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재건했다는 집 구조를 살펴보았다. 불타버린 구들장 위에 적당히 담을 쌓아 벽을 만들고 불에 타버린 지붕은 함석을 씌웠다. 벽에는 신문지를 발라 피난살이 풍경이 역력했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는 부모님께 우리들의 결혼 문제를 얘기했다.

부모님들은 전쟁이 끝나면 결혼을 하되 딸을 단양으로 데려가지 말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간절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섯 형제 중 3남이지만, 부모님께는 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며 곁에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하면 고향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나를 경계하시던 이 양 부모님은 나를 너무나 자상하게 대해주면서 하나밖에 없는 사윗감을 아들처럼 여길테니 함께 살아보자고 말씀하셨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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