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부분의 아픔은 전체의 신음
그리스도가 곧 교회이다(요 2:21).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엡 4:15)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전 12:1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하나의 유기체라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자식을 자신의 몸의 일부로 대하는 부모의 심정도 그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롬 8:15).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다(요 1:12).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으로 대하신다. 부분의 아픔은 머리의 고통이자 전체의 신음이 된다. 우리는 한 몸이다. 하나님의 몸이다.
유기체의 특성상 부분의 오염은 모두를 위협한다(고전 12:26). 그 대표적인 예가 아간의 범죄이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여호수아의 군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수 7:5). 그뿐만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한 리더의 범죄는 모두의 속죄를 요구했고(레 4:3), 신약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은 교회 전체의 순수성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행 5:1-11).
같은 스토리는 오늘도 반복된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며 숨은 죄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되며 전체의 패배를 불러온다.
우리는 전투를 수행 중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제자를 세워나가며 제자화 모임 중심의 교회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이 소명은 개별적으로 숨은 죄들을 회개로 제거하며 함께 예수님을 따를 때 수행 가능하다.
교회는 고난 받는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 주께서는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청년에게 여우나 공중의 새보다 못한 삶을 예고하셨고(눅 9:57,58), 아버지 장례보다 더 큰 우선순위를 요구하셨으며(눅 9:59,60), 심지어 가족보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까지 말씀하셨다(눅 9:61,62). 이는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선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나섰다(막 1:18).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신실한 자들에게조차도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셨다.
사랑하는 주님이 교회를 위해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골 1:24). 함께 승리하려면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과정이며,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 위에 섰고,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안에서 또 진행된다.
교회는 제자들의 모임이다. 제자들은 제자화를 한다. 제자화 진행은 수고로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낳아 기르는 일은 희생을 요구한다.
교회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치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체득(體得)되는 과정이다. 거기엔 정규 커리큘럼에 따른 교실 수업 같은 게 없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듯,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듯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체득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과정이 있다.
물건 하나를 사도 지불한 가격만큼의 가치를 얻는데 하물며 교회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독생자의 대가, 그 가치를 호가하지 않겠는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지불하신 값비싼 고난의 열매가 담겨있다. 그 열매가 다 익으면 떨어져 썩어서 새싹을 틔워야 한다(요 12:24).
예수님의 몸을 찢고 틔운 싹이 교회열매가 되었다(롬 3:25,26). 예수께서 몸으로 대가를 지불하셔서 교회를 사셨다(행 20:28). 십자가 사랑으로 여문 교회다(요 14:24, 롬 5:8).
교회가 진행된다는 것은 그 희생의 가치를 담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제자화의 진행은 하나님 사랑의 가치를 담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스민 사람, 보혈에 물든 사람, 희생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람이 교회가 된다.
교회의 성공
예수님을 따라가야 제자이고, 제자여야 제자화 진행이 가능하며, 제자화를 진행해야 교회가 탄생된다. 즉, 예수님을 따라가야 교회가 탄생된다. 일반적인 성공의 의미에서 보면 교회는 성공과 거리가 멀다. 제자화 사역을 통한 교회 개척자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전적 의미의 성공(成功)은 “목적하는 바를 이룸”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부와 명예의 취득이 그 목적하는 바다. 심지어 교회의 성공에 있어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라서 그분의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목적이 이뤄져야 한다. 즉, 일반적 성공(成功)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적을 이루는 성공(聖功)이어야 한다.
교회를 하면 사사로운 야망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예수를 좇아야 한다. 이득을 주는 사람들 대신 당신을 버릴 한 영혼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취미생활이나 멋진 여행 대신 밤낮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야 한다. 돈 버는 일이나 재테크 대신 빠듯한 살림에 남을 먹이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해야 한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사명 선언문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공을 위해 제자는 쇠하여야 한다.
교회는 명예 성취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교회의 일은 사역자의 이력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성령께서 다 하시고, 모든 영광도 주님이 취하신다.
제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능력의 증인이 되는 일도(행 1:8, 4:8), 박해 가운데서 담대한 것도(행 4:31),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성장해가는 것도(행 9:31), 사역의 방향성과 그 진행도 성령께서 주도해가신다(행 16:6-10). 또 사역자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일도(행 13:1-5), 이적과 그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신다(행 2:43, 4:16,30,31, 5:12, 6:8, 8:6,13, 14:3, 15:12, 19:11).
사역자의 잘난 부분마저 성령의 주도적 사역 아래 다 사라진다. 교회를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하면서도 아무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계 4:10). 어떤 수고를 해도 자신의 성공이 아닌 주님의 성공을 꾀하는 만물의 찌꺼기이며(고전 4:13), 무익한 종들이며(눅 17:10), 품꾼들이며(눅 15:19), 삯꾼 아르바이트생들(요 10:12,13)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고난 받기로 작정된 인생이고(골 1:24), 주님을 섬기기 위해 제자화 밑거름으로 썩어 없어져야 하는 사람들이다(요 12:24-26).
성공적인 교회
리더십 때문에 부흥하는가? 시스템 때문에 성도가 많아지는가? 외모가 청년스러우면 청년사역이 되고, 노인스러우면 노인사역이 되는가? 사역 방법에 녹아든 동시대적 문화적 접근이 성공을 가져다주는가?
다 아니다. 성도들을 교회로 보내시고(행 2:47),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행 2:37, 16:14).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주역이며(행 6:7, 12:24, 13:49, 19:20), 구원하는 능력은 사역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서 나온다(롬 1:16, 고전 1:18). 말씀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 전파되어야만 한다(롬 15:18,19, 고전 2:4,5).
주님이 다 하신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가는 자는 누구나 교회를 할 수 있다(고전 1:26-29). 우리가 할 일은 함께 예수님을 의지하며 따라가는 것뿐이다. 그러면 교회는 주께서 이루신다.
수많은 프로그램들로 바쁘게 땀 흘리더라도 기도와 말씀에 방해된다면 당장 중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이 일하시게 하려면 먼저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께 붙어있어야 한다.
그래도 교회를 하는 두 가지 이유
조금이라도 성공할 생각이 있다면 왜 하필 교회를 하겠는가? 교회의 일부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끝난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교회를 하는 한 이미 망한 인생, 끝장난 삶을 사는 중이다.
하늘 상급 외엔 기댈 노후자금이 없고, 그리스도 앞에서의 유명 외에는 기댈 명예가 없으며, 언젠가 나를 떠나갈 영혼들 외에는 유산이 없는 인생이다. 교회 개척자의 삶, 제자화 사역자의 삶이 그렇다.
그럼에도 왜 교회를 하고자 하는가? 사랑 때문이다. 주님이 먼저 사랑하셨고(요일 4:19), 나도 너무 사랑하고 또 의지하기 때문이다(시 13:5,6). 내 사랑하는 주님만 홀로 영광 받으시는 일에 티끌 하나의 무게로라도 쓰임 받고 싶고(사 6:8, 합 1:14), 주님과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시 84:10).
또한 소명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고(마 4:19), 죄 가운데 주님을 배반했을 때에도 찾아오셔서 “밥 먹자”고 해주셨기 때문이다(요 21:12). 그분을 따라나설 때 손에 쥔 것을 버리고 나섰으며(마 4:20), 그분이 이 죄인에게 자신의 양떼를 맡기셨기 때문이다(요 21:15-17).
사랑과 소명 안에서 교회는 예수님을 따른다.
교회는 그 사명을 거부할 때,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_도널드 밀러(Donald Miller)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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