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0세 되신 엄마는 믿음이 좋으신 분이 아니셨다. 천국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라고 꼬집어 말씀하실 때도 있었고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나 때문에 불만이 많으셨다. 몸살기로 찾아간 동네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실 것을 권유받고 내원했던 날, 엄마는 응급실을 거쳐 입원실,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평생 병원신세 진 적 없으셨고 잘 드시고 잘 주무시던 분이셨는데 메르스로 한참 시끄러운 때에 온갖 검사와 다양한 주사바늘을 꽂으셔야만 했다. 만성신부전증으로 시작한 병명은 패혈증, 독성쇼크 신드롬이라는 이름을 거쳐 결국 병명을 찾을 수 없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런 엄마가 그 고통의 침상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셨다. 그리고 엄마의 그 소박한 믿음이 엄마를 두고 해외로 아웃리치를 떠나는 나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힘이 되었다.
“엄마, 나 가지말까?”, “잘 다녀와~” 아웃리치로 출정하기 전날에도 엄마는 내게 이렇게 인사하셨다. 한 번도 하지 않으시던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엄마 다시 볼 땐 여기 말고 집에서 봐”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주님이 부르신 땅 러시아를 반으로 접으면 그 자리가 시베리아, 곧 N시다. 수요일 밤, 백야를 지나고 있던 그 곳 시베리아에서 주님은 죄인 된 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내게 실제 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영원한 본향, 그 집이 될줄이야
어릴 적 술주정뱅이라 불리던 아버지 때문에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소리가 제일 두려웠다. 사는 날 동안 모범생이라는 옷으로 나를 둘렀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 명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악한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죄인이었다.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몰랐다. 어둠이 걷히고 복음의 빛이 비춰졌을 때 내 영혼에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은 눈물로 나눌 수 있게 하신 자리였다.
내 순서를 마치자마자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함께하는 지체들과 예배를 드리고 엄마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엄마!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남편에게 인사말을 전달하고 잠자리에 누운 그 새벽, 17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온갖 말로 나를 정죄하고 눈을 흘기더니 시퍼런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뀐 장면에서 목욕을 마친 것 같은 주의 종으로부터 어머님의 소천 소식을 듣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었을 때 어머님의 소천은 현실이 되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집’이었다. 집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 집이 그집(본향) 이었구나!
주님은 일련의 시간을 통해 사탄이 영혼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실패했다는 것과 엄마의 마지막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알려 주셨다. 주님은 이후로도 엄마 곁을 지키지 못한 딸에게 당신의 모든 위로를 더해 주셨다.
그러나 정오가 되기 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하나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집에 보내주세요. 집에 갈래요. 근데요. 주님,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이때에 주님 뜻을 따르고 싶어요.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해 주세요.” 그러나 공격은 계속 되었다.
배낭을 메고 마트에 다녀오고, 마실 물을 길러오고, 커피를 정돈하는 일들을 하며 ‘내가 복음을 전하는 강사도 아니고 이 대가지불을 하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가?’
그러나 그때 알았다. 순종은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의 자리에 있을 때 그냥 그 자리가 순종의 값이 되는 것이었다.
현장의 선교사님들의 삶이 그렇고, 목회를 하는 사모라는 나의 삶의 자리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일상을 나는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 아! 이제는 그 자리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계속> [GNPNEWS]
송현주 사모(평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