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앤 김 교수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교)
289호 / 사람풍경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980년대에 미국 땅을 밟았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뛰어넘을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욕망을 꿈꾸는 삶으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그때 복음의 진리를 들으며, 죄인된 나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 이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십자가 증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조앤 김 교수를 만났다.
– 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1987년도에 남편의 미국 유학길에 저도 함께 따라갔어요. 그때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어요. 남편과는 대학 영어회화 서클에서 만났어요. 저는 당시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학교와 직장 사이에서 공부를 그만둬야 하나 갈등하는 중이었고, 남편은 컴퓨터 관련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 준비를 하던 중이었어요. 당시 한국이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지금처럼 공부하다 아무 때나 나와서 결혼을 할 수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결혼을 하든지, 헤어지든지 결정해야 했는데, 결혼하기 좀 이른 나이였지만 결혼을 강행해서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됐어요.”
– 미국 생활은 어떠셨나요?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시댁의 도움으로 남편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 받았지만, 저희가 미국으로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시댁이 부도를 맞게 되면서 더 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줄 수 없었어요. 저희는 그 상황에서 귀국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나이도 어리고 경제활동도 해본 경력이 없어서 그 이후 수년간 눈물나는 고생길을 걸었습니다. 라면 하나 살 돈 없이 힘들게 살고 있었는데, 한 한인 교회 목사님이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분의 소개로 한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캐셔 일을 하게 됐는데, 1992년에 LA 폭동이 일어났어요.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차들은 뒤집어져서 불이 붙어있고 가게 유리들은 다 깨져있었죠. 제가 그 한복판에 있으면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게다가 1994년에 노스리지에 대지진이 났어요. 태어나서 처음 지진을 겪었는데 갑자기 방이 흔들리고 선반에 있는 그릇들은 모두 떨어지고 밖에서는 자동차 알람이 울리더군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고 불이 났어요. 사람들의 비명 소리, 우는 소리, 대피하는 소리, 사이렌 소리가 혼란스러웠어요. 지진의 트라우마도 오래갔어요. 그 이후로 엘리베이터를 못탔어요. 엘리베이터의 흔들림이 여진과 매우 비슷했거든요. 죽음의 공포를 어린 나이에 느낀 것이죠.”
이민자로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며
–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네요. 그 이후엔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금은 불법체류자가 영주권자와 결혼하는 방법 외에는 영주권을 받을 길이 없지만, 당시는 스폰서가 있으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 제가 가진 근면성과 의지를 한 분이 높이 사셔서 스폰서가 되어주셔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어요. 우리를 도와준 목사님이 시카고에 있는 교회로 옮기신 이후에 저희 일자리를 구해놓고 우리를 부르셨어요. 지진 후유증으로 우리가 어려웠던 것을 아셨던 것이죠. 그렇게 1994년도부터 시카고에서 자리를 잡았어요. 남편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래도 2000년도에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가시밭 길이었어요. 그러나 제 이야기가 특별한 건 아니에요. 이민 1세대는 모두 겪는 이야기죠.”
김 교수는 이민세대들이 겪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녀는 대화 중 고국 땅을 떠나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또 자연재해나 인종차별 등 고국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마운 시간이었는지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 갑자기 다른 주제이지만, 이민 1세대로는 영어가 탁월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하셨나요?
“제가 영어를 잘한다는건 모두 한국 사람들의 평가에요. 저는 미국 학교에서 원어민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주일은 뺀 일주일 내내 원어민과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영어 실력이 좋다고 느낄 기회가 없어요. 다만 도미 초기 간단한 인사만 간신히 하던 영어 실력이 지금은 전문적인 학문을 원어민과 논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는 건 느낍니다. 미국에 와서 10여년 까지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게 바빴기 때문에 영어 공부는 잘 못했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어요. 그냥 마구잡이로 공부를 했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제가 1980년대에 유행했던 한국의 유명한 영어 회화 강사들의 테이프를 한국에서 보내달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하고 외웠어요.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됐어요.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ESL 클래스를 개설하면서 영어를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그동안 물불 안가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구잡이로 했던 영어 공부를 이제 좀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치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게 된 것이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효과적인 방법 터득해
– 대학에서도 강의를 하고 계신데, 어떻게 공부를 하게 되신 거죠?
“저희를 도와주신 목사님이 미국 직장을 소개시켜줬어요. 경리부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최종학력에 따라 월급이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월급은 얼마 이상은 안 올라갔어요. 제가 고졸이잖아요. 내가 받고 있는 월급이 여기서 얼마 안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있잖아요.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는 한 벌이에 한계가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2등 시민으로 살 수 없다.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다닌 직장이 주정부 대학이어서 업무와 관련된 공부를 하면 학비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어요. 그렇게 일리노이주립대학에 들어가서 아이를 둘을 키우면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어요. 안되는 영어로 고생하면서 눈물나게 공부한 것이죠.”
– 공부는 어떠셨어요?
“저는 한국에서 공부할 때 제 적성이 문과라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에서 발견을 못 했던 이과적인 적성을 미국 선생님들이 끌어내줬어요. 이런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좋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공부가 너무 재밌더군요. 수업 시간에 바보 같은 말을 하거나 정답에 동떨어진 말을 해도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하는 교육 시스템이었던 것이죠. 나의 재능을 발견해주고 다듬어주는 교육 시스템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어요. 제가 30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가서 40대 중반에 대학원을 다니고 나이 50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어요.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면서 교육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죠. 지도교수님은 교육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교육은 사람을 공부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 정말 열심히 인생을 살아오셨군요.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바닥을 치는 지점이 있었어요. 저도 나름 기독교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나만의 아메리칸 드림을 쫓고 있었어요. 가방끈이 짧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전문직을 갖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좋은 혜택을 누리는 곳까지 올라가리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남편과 제가 꿈을 쫓으며 살다보니 신앙은 갈수록 떨어졌어요. 아이들도 사춘기를 겪으면서 교육하는 게 힘들었어요. 미국에서는 아이들에게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구애받지 않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고 가르쳐요. 아이들이 반항하는 시기에 자기 논리를 펴면서 엄마는 틀리고 자기는 맞다고 이야기했죠. 아이들과 관계가 나빠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나빠졌어요. 그때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내 죄 때문이라는 걸 몰랐어요. 인생이 완전히 바닥이었을 때 한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복음학교라는 훈련을 알게 됐어요. 저는 당시에 저를 구원해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상관 없었어요. 당시 예수님이 알고 싶어서 신학 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급함이 커져 있을 때였거든요. 그렇게 모든 학사 일정을 다 취소하고 2016년에 복음학교에 참여하게 됐어요.”
복음 통해 인생문제의 정답 찾아
– 복음학교에서 어떤 은혜가 있으셨는지요?
“복음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제가 얼마나 사탄에, 죄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어요. 제 인생의 B.C와 A.D가 나눠지는 시기였어요. 거기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동안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내 죄 때문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죄 곧 나, 나 곧 죄’라는 말씀이 믿어졌어요. 그 말씀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었죠. 그동안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왔어요. 한 주 동안 선포되는 말씀을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될 만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나의 존재가 바뀌는 걸 경험했어요. 일생일대의 기쁜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주님이 은혜의 자리에 저를 끼워주셨어요. 순회선교단 미주지부에서 2017년부터 다음세대 복음캠프(NGPC) 강사로 저를 불러주셨어요. 그때부터 일 년에 두 번씩 가서 복음을 나눴는데, 그게 저를 복음 앞에 지속적으로 서게 하는 계기가 됐어요. 우리 아들도 NGPC에 참여하면서 변화를 받았어요. 남편도 복음학교에 참여하게 되면서 복음이 우리 집안을 건져주셨어요.”
–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지금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근교의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교(Trinity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학부에서는 크리스천 미니스트리(Christian Ministry)와 졸업반을 대상으로 리서치 관련 수업을 하고 있어요. 대학원에서는 크리스천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어요. 교수 사역이 주된 일이고, 그동안의 영어 공부 노하우를 살려서 미국에서 영어로 고생하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요. 현지 이민 교회에서는 영어예배(English Ministry)를 담당하는 사역도 하고 있습니다.”
<이상 289호에 게재>
– 끝으로 영어 전문가로서 영어 공부를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영어 공부를 잘 하려면’이라는 주제는 큰 주제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없겠지만,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영어 공부에도 왕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보니 현명하게 공부하는 방법은 있더군요. ‘반복(Repetition)’과 ‘노출(Exposure)’이라는 큰 명제 하에 쉽고 짧은 표현들을 반복하여 익히고 적용해 보면 돼요. 또 이를 원어민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통해 배운 것을 노출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단시간에 효과를 보려고 기대하지 말고, 꾸준함을 동반해서 적어도 3~4년은 노력해야 레벨이 올라갑니다. 제가 운영하는 영어 클래스를 보니, 학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한 학기를 쉬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 경험상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거기서 영어 공부가 중지돼요. 우리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큰 오류인지 알듯이, 온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바빠서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어야말로 21세기에 선교의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하거든요.”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계획이 없는 게 제 계획이에요.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이제까지 내가 계획해서 그대로 된 건 하나도 없더군요. 미국에 와서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 캠퍼스 강단에 서고, 교회 EM(English Ministry, 영어예배)을 섬기는 일들은 제가 꿈 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에요. 계획이 없어야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싶어요. 내 달란트, 취향,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시는지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하나님이 어떤 자리에 부르실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이 마음을 유지하는 게 계획이에요.”
– 기도제목 나눠주세요.
“아주 연약한 이민자 여성을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셨잖아요. 분명히 주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살아보니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분위기에요. 또 학생들은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태어나보니까 기독교인이 된 문화적 크리스천이 많아요. 마음에 획기적 변화가 없는데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어요. 이들의 꿈은 성공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죠. 복음과 세상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교훈을 헷갈리는 경향이 보였어요.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적은 거 같아요. 겸손해져야 만나는데 말이에요. 나를 이곳에 심어 놓은 건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그러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환경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살다가 주님 나라 가고 싶어요. 저도 이전에 명목상 신자였고, 나중에는 열심 있는 교회만 나가는 신자였어요. 학생들도 그렇더군요. 예수님이 내 삶의 힘이요,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아요. 이 자리에서 지식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닌 기독교 문화에 물들어 있는 많은 미주 크리스천들에게 십자가 복음의 증인이 되고 싶어요.”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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