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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기 칼럼] 모범이 되라

ⓒ 복음기도신문

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Crazy

예수님의 행적은 매우 독특했다. 12세에 가족여행 도중 몰래 사라져버려서 부모를 근심케 하셨다(눅 2:48). 공생애 사역 초기에는 정결 예법에 쓸 6개 항아리의 물을 모두 포도주로 바꾸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정결법을 무시하셨다(요 2:6). 어머니와 형제들의 문안을 거절하시기도 했다(막 3:33-35).

한 제자에게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셨다(마 8:19-22). 반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자청하는 청년에게는 자신은 노숙자일 뿐이라고 하셨다(눅 9:57,58). 그리고 한 부자 청년을 말도 안 되는 요구로 돌려보내버리셨다(눅 18:21-25).

그뿐인가?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는 돼지 떼 2천 마리를 몰살시키셨고(막 5:13), 지도자들이 신봉하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며 질책하심으로 당시의 문화코드와 질서를 깨셨다(막 11:17).

예수님이 가까이했던 사람들도 특이했다. 그분의 제자들은 어부, 멸시받는 직업을 가진 자들 혹은 세리였다(마 11:19). 또 그분의 친구들은 대부분 심각한 죄인이었다(레너드 스윗 Leonard Sweet, 《Jesus Drives Me Crazy(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Zondervan, 2003, 13-33쪽).

이런 예수님의 언행은 어디서나 공개적이었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법을 생명처럼 여기던 유대인들 앞에서 하필 그 법을 어기셨다. 그분은 공개적으로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일과 병 고치는 일을 지속하셨다(마 12:1-13, 막 2:23-3:6, 눅 6:1-11).

또한 의심하는 자들의 표적 요구를 정면으로 질책하셨고, 예수님의 신성을 불신하는 권력가들 앞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대놓고 말씀하셨다(마 16:1-4, 요 10:30).

게다가 성전을 목숨처럼 생각하던 종교지도자들에게 그곳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막말을 하셨으며, 심지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던 절대 권력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까지 서슴지 않으셨다(마 21:13, 12:34).

예수님의 언행은 대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시냐는 질문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다(눅 9:18,19). 그분의 존재 자체가 당시의 가장 큰 사회적 이슈였다(게리 윌스 Garry Wills,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돋을새김, 2006, 11-31쪽).

식탐자

예수님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분을 궁금해했다. 예수께는 이미 여러 가지 성경적 별명들이 있었다. 그분은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로 불리셨다. 또한 이사야서에 의하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도 불리셨다(사 9:6,7).

그 밖에도 선지자, 왕, 인자, 기름부음 받은 자, 여자의 후손,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 알파와 오메가 등등 수많은 호칭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등장하는 몇몇 별명들은 매우 세속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귀신들린 자, 식탐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 등으로 불렀다(막 3:21, 눅 7:34, 11:15).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듣기에 거북하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 즉 ‘식탐자’라는 별명이다. 그러나 이 별명이 사실무근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식사를 중요시하셨다.

세례 요한이 비참하게 죽은 상황에서도 제자들과 밥 이야기를 나누셨다(마 14:6-15).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면 안 된다는 법을 깨뜨려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결국 식사 때문이었다(눅 6:1). 심지어 사역의 현장에서도 여러 번 ‘밥’이 등장한다. 자신을 초대한 사람들의 집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은 식사였다(눅 7:36). 한 여자가 귀한 향유 옥합을 들고 왔을 때도 식사하시던 중이었다(마 26:7).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하셨던 일도 역시 식사였다(막 14:16). 그분은 정말 식탐자로 보일 만했다.

밥 문제

끼리끼리 모이는 것만 같다. 제자들도 예수께 밥에 대해 자주 질문했다. 그들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것은 한 번뿐이다. 한편, 같은 주제에 대한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사복음서에 밥 문제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예수님, 물 위를 어떻게 걷습니까?”, “귀신은 어떻게 내쫓는 겁니까?” 등의 질문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밥에 대한 질문은 적어도 세 번 이상 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26:17)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15,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혹시, 예수님이 부활 직후에 제자들과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는가? 설마… 식사? 맞다. 식사!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 24:30,41-43)

성만찬

흔히들 ‘최후의 만찬’이라고 일컫는 스토리가 마태복음 26장에 담겨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식사를 중요시하는 이유를 설명하셨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그분을 기념하는 일이었다. 먼저 주께서 직접 식사 기도를 하셨다.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

여기 기록된 “떡”은 당시 유대인들의 주식이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밥”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제자들이 한국인이었다면 예수님은 밥솥을 붙들고 식사 기도를 하신 후, 한 공기씩 퍼 담아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성만찬은 식사다. 평범하다. 금식은 거룩해 보였지만 밥 먹는 건 세속적으로 보였다.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깨끗해 보이고 이삭을 잘라서 비벼 먹는 것은 탐욕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함께 식사하는 것을 제자화 모임에서 중요하게 다루셨을 뿐 아니라 그분을 기념하는 일을 음식에 결합시키셨다.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다시 40일을 지내시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하셨다. 함께 밥을 먹는 일은 그분이 제자들과늘 하셨던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인사한다. “언제 밥이라도 한번 먹자!” 이것은 성경적인 인사다. 예수님은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제자화의 방법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단지 먹고 배부르기 위함이 전부라면 제자화나 교회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식사를 하든 음식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면 그곳이 바로 제자화를 진행하는 교회가 된다. 일반적으로 삼시세끼를 먹는 일상 안에 제자화가 있다. 밥을 함께 먹으며 그 음식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밥을 보면서 예수님의 몸이라고 생각하며 먹으라. 국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라고 생각하며 마시라. 음식물은 물리적으로 몸 안에서 에너지원이 된다. 제자들은 하나의 에너지원을 함께 섭취한다. 또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그 에너지원을 쓰며 살기로 함께 다짐한다.

일상의 공유

예수님이 명령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이 명령을 듣고 제자들이 그분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이루어주셨다.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켜주셨다.

이 문장을 잘 살펴보면 일이 구분되어있다. 제자의 일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다. 따라갈 때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을 경험한다. 사실 그것이 그분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이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4)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먹고 마시며 매일 밤과 낮을 보낸 사람들은 배움을 얻었다. 동행을 통해 어떻게 기도하고, 사역하고, 사람들을 섬기는지를 배웠다.

그런 면에서 제자화는 교실 기반의 수업일 수 없다. 오히려 도제교육(徒弟敎育)에 가깝다. 예수님의 제자화 수업은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그분을 따르는 삶이 각자의 인생에 서서히 물드는 과정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제자반 32주 강좌’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삶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동행해주셨다. 동행하면 삶을 지켜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삶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또 모든 것을 공유하셨다. 그분은 제자들 삶의 기준이자 모범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우리도 그렇다. 지식전달만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제자 심은 데 제자 난다”(송준기, 《무서워마라》, 규장, 2016, 197쪽). 그분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동행자가 제자를 만든다.

동행할 때 식사만큼 좋은 것이 없다.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하며 일상 중의 일상이다. 만약 예수님의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한다면 그는 제자화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어라. 새생명 축제에 친구를 초대해서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나 주일예배에 동료를 초대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만나서 밥을 먹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평범할 뿐만 아니라 때로 세속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중요한 제자화 방법이다.

그분을 따랐던 신앙 선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선배 권사님들은 매일 아침 밥솥을 열 때마다 성만찬을 하셨다. 아침밥이 다 되면 솥뚜껑을 열고, 가장 먼저 밥주걱으로 큰 십자가를 밥

위에 그리셨다. 그리고 밥을 퍼 담으며 기도하셨다.

“주여, 오늘도 식구들이 이 밥을 먹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이 그들의 몸을 통해 하실 법한 일들을 하도록 도우소서.”

선배 장로님들은 직장에서 일부러 점심시간마다 전 직원을 한 번에 한 명씩 만나서 식사하셨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축복하고 적시적지(適時適地)에서 도와주며,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주셨다. “주여, 오늘도 또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점심식사를 함께한 김 부장을 축복하셔서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그들은 교회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제자들이었다.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갔고, 그 모범을 일상에서 보였다. 식사뿐만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이 제자화이다.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를 만난다. 그때 가장 일상적인 일을 함께하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누군가와 일상을 함께하라.

제자들이 교회다. 제자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 즉 일상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상에서 운영되는 평범한 것이 될 수 있다. 교회를 세우는 일, 즉 제자화를 하고 싶다면 교회 건물 밖에서 누군가와 밥을 먹어라.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일상을 공유하라.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함께 발견하라.

겉으로 보이는 출렁이는 파도가 아니라 저 깊은 바다 밑에서 묵직하게 흐르는 해류가 닮아야 진짜 닮은 것이다_김형태, 《예술과 경제를 움직이는다섯 가지 힘》, 문학동네, 2016, 6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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