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송준기 칼럼] 무엇이 먼저인가

ⓒ 이영선

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 11:7, 8)

교회의 시작

웨이처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지 16년이 지나서야 태어난 이름이었다. 가장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실행, 종이 위에 적은 교회 이름, Way Church.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럴수록 확신이 커졌다.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예수님의 도구이자 내 미래였다. 남은 인생 동안 내 임무가 될 이름이었다. 큰 기쁨이 임했다. 혼자 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였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아내와 나누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웨이처치를 세우자고 했다. 교회와 선교를 구별하지 않는 교회론을 함께 준비하자고, 방향이 분명하니 방법은 함께 찾아보자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개척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나중에 들으니, 아내는 나보다 일주일이나 앞서서 개척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 중이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같은 마음을 부부에게 주셨다. 신기했다. 나는 아내와 하나였고, 그녀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한 분이셨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는 동안에 웨이처치의 시작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휴식했다. 거의 3년 만에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고, 숲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날들을 돌아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새벽에는 내가 기도하고, 밤에는 아내가 기도하며, 낮에는 함께 연구하기로 했다. 최대한 6개월 이내로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자고 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로다 (시 37:4)

개척 비용

목표가 생기자 시간의 밀도가 높아졌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반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교회 개척’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훑었고, 교회론과 개척 실행에 관한 자료들을 섭렵했다.

또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밤낮으로 함께 기도하며, 정시 가정예배도 진행했다. 밤 9시만 되면 무조건 예배했다. 그 시간에 집에 손님이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방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가까운 지인들이 우리의 변화를 눈치챘다. 우리가 교회 개척을 위해 한국으로 곧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주변에 퍼졌다.

함께 공부하던 가까운 선배가 만나자고 했다. 소식을 들었다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구운 케이크를 들고 아내와 선배의 집으로 갔다. 이웃의 식사 초대에 우리는 즐거웠다.

선배는 내게 궁금한 것부터 서둘러 물었다.

“5억 있어?”

‘그렇게 큰돈이 있을 리가 있나?’

내가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내게 너무 ‘나이브’naive한 것 아니냐고 했다.

“어떻게 열정만으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해? 다시 기도해봐.”

매우 일리가 있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나와 교회론이 달랐다. 그 질문에는 그의 교회에 대한 정의가 깔려있었다. 그에게 교회 개척은 새로운 교회 건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교회=건물”이라는 교회론이었다.

한편, 나는 정확한 액수가 거론되는 것이 궁금했다.

“왜 하필 5억이에요?”

선배는 나름 계산이 있었다.

“어허… 교회 개척을 하겠다면서 그런 생각도 안 해봤나?”

그러면서 종이 위에 교회 건물에 들어가는 비용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교회용도 건물 보증금과 월세, 실내 인테리어 비용, 각종 집기와 기기 비용, 부대비용, 옥상 첨탑 비용 등등. 꽤 조사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수치는 신뢰가 갔다.

성경을 붙들고

내 대답은 담담했다. 성경 어디에도 5억에 대한 말씀이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저는 50만 원도 없는데요?”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선배가 또 물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교회를 세울 건데?”

대답은 뻔했다.

“예수님을 향한 제 믿음이요.”

그도 성경을 잘 알아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인용한 것임은 쉽게 짐작하는 듯했다. 대답을 듣자 선배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 “매우 순수한 목사”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어쩌면 놀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순수한 생각으로는 교회를 시작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었고, 화제는 다른 것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에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성경을 붙들고 기도하며 연구했다. 그리고 성경을 붙들고 교회를 시작했다.

정착의 유혹

만약 농부가 곡간을 꾸미는 데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하느라 들판에 나가서 손에 흙을 묻히는 데 소홀했다면 그는 얼마나 바보 같은가!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곡간 꾸미기에 사용하고 있는가? 또 교회는 멋진 곡간을 지은 후 그 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들판을 향해 “곡식들아, 어서 곡간 안으로 들어오너라”라고 소리 지르는 바보 같은 일을 얼마나 자주 행하는가!

교회 건물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교회는 할 수 있다. 다만 건물이 교회보다 우선시되는 교회론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높이 섬기면 우상숭배일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들이 지상에 퍼져서 살기를 의도하셨다. 노아가 방주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은 두 번이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노아의 후손들은 한 장소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에 바벨탑을 쌓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들을 흩으셨다(창 11:7,8). 이것은 정착이나 건물 짓기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흩으신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탈중앙집권화 시켜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본래의 명령에 순종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약의 교회도 “땅에 충만하라”는 구약의 명령을 이어받고 있음을 마태복음 28장 19,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 등의 대위임명령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도 오늘날 우리처럼 한 장소에 멈추어서 건물을 지으려는 유혹이 있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요구했던 것을 보라. 그는 거기에 정착하여 건물 짓기를 원했다(마 17:4).

“와우, 예수님! 여기가 좋겠어요. 당장 교회 건물을 지어 올립시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에 뒤이어 하나님의 두려운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한 장소에 안착하기를 바란다. 오늘날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건물인가

그러나 초대교회는 하나의 지정된 건물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개척 운동의 형태로 존재했다. 예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을 떠올려보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제자들은 한 지역에 머물러 교회 건물을 지으라는 명령을 들은적이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야 했다. 그것은 주님의 부탁이자 명령이었다. 사실 ‘사도’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도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냄을 받은 자들이 끊어지는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박해가 사라지고 국교로 인정된 때였다. 사실 그때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박해가 사라지고 교회가 더 이상 사람들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을 보내는 운동이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1~3)

그러나 더 이상 사람들을 보내지 않기 시작한 때는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인정되고 박해가 멈추었던 때와 일치한다. 교회 건물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던 때이기도 하다.

건물보다 크신 분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분은 지정된 어느 장소의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을 처소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겔 37:26-28). 이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주제이다(요 16:7,8, 벧전 2:4-9, 고전 3:16, 6:19, 골 1:27).

열왕기상 8장을 보라.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하신 최초의 지상 거처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움직이는 천막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이동식 천막을 거처로 삼으셨다. 이후에 다윗이 멋진 건물을 짓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건물을 짓게 하신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건물 자체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이사야도 같은 관점으로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그뿐인가? 사도행전 7장에서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던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7:48).

교회와 교회 건물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보라(행 7:48-51, 17:24,25). 성경은 도처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건물보다 더 크신 분이다.

건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필수요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죄인들에 의해 건물이 하나님과 동일시되거나 심지어 더 크게 여겨졌던 역사가 성경에 수두룩하다. 어제의 우상숭배는 오늘도 여러 형태로 우리에게서 나타난다.

구약의 성전,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사도와 성도들, 예수님의 디자인을 볼 때 무엇을 근거로 교회가 건물이란 말인가?

교회 정의에 대한 다양성은 형태적 측면에서 끌어안아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기능적 정의를 말하고 있다. 답해보라. 교회는 건물인가?

훌륭한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높은 성을 쌓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_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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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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