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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해방 이후 직조공장 열풍, 기술자로 일하며 주경야독

사진: Janko Ferlič on unsplash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7)

형님을 찾으러 서울로 가다

어느 날, 단양공회당 광장에서 군민 콩쿨대회가 열렸다. 내 노래 실력을 아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무대에 섰다. ‘귀국선’이라는 노래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벽시계를 받았다.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어떤 분이 나를 불렀다.

“봉가야, 너도 형을 닮아 노래를 잘하는구나.” 그러면서 집 나간 형님을 서울에서 만났다면서 궁금해 하던 형 소식을 전해 주셨다. 형이 사는 집주소를 물었으나 모른다고 하셨다. 대신 서울대학병원 구내식당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튿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차비를 구해 밤 8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새벽녘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초행길이라 물어물어 걸어서 서울대학병원을 찾아 구내식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목 메인 소리로 ‘형’하고 불렀다. 형은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나를 바깥으로 내몰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너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니. 당장 내려가라.”
“형 화났어?”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나는 되물었다.
“글쎄 잔소리 말고 빨리 내려가라.” 형은 무척 흥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나는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내려가는 차비는 물론 물 한모금도 얻어먹지 못하고 서울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면서 화를 내는 형의 입장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술 잘 마시고 배짱 좋기로 유명한 총각이 그저 식당 조리실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신세가 단양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을까. 그 자체를 인격적인 수모로 받아들였다면 순간적으로 그렇게 감정이 폭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형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모처럼 찾아간 동생을 인정사정없이 냉대한 형의 본심도 몹시 괴로웠을 것 같았다. 문제는 단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과거 담배 장사 시절의 무임승차 기술을 또 한 번 발휘하여 안전하게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날이 다정했던 형님과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님과의 이별은 그랬다. 나는 1953년 1월에 결혼했으나 전시 상황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다. 그해 4월, 집사람이 첫 아기를 임신했을 때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밤 꿈을 꿨다. 한적한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모여 있기에 나도 그곳을 기웃거리는데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범인은 차 씨야…” 그 말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집사람에게 꿈 얘기를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나는 집사람과 그날 고향에 무사히 도착했다. 부모님은 예쁜 며느리를 보게 됐다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며 칭찬하셨다. 그날 밤 어머님은 통곡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연인즉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방 후 행방 불명 되었던 작은 형(병원식당에서 만난 형)은 1952년 충북 제천의 미군부대에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예전과 다름없이 늘 술에 취해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제천 사회에서는 깡패 같은 행동을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고 했다.

어느 날, 제천 경찰서에서 형님의 시신을 확인하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놀라서 달려가 봤더니 실제 형의 시신이 맞았고 부랴부랴 장례를 치렀다는 어머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지난 밤 꿈이 떠올라 아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꿈속에서 들었던 ‘차 씨’라는 이름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훗날 대한철광 본사의 인사 계장 시절, 차 씨 성을 가진 인물이 발견되면 출신 성분을 세세하게 조사해 보곤 했다. 객사한 형님이 왜 그런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한 채 궁금한 세월을 살아온 지 어느새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직조공장 기술자가 되다

1946년부터 단양 사회에는 직조공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다. 1949년 무렵에는 공장이 6개로 늘어났는데 사업주는 대부분 북한에서 월남한 평안도 출신 인사들이었다. 공장들은 직조기 3-4대 정도를 갖춘 소규모 업체로 주 생산품은 은방견이라 불리는 비단 옷감이었으며 더러 물항라도 생산하였다.

원사는 서울에서 조달되며 생산된 완제품은 서울에서 전량 매수해 갔다. 명주 실타래 원사는 큰 가마솥에 빨래 비누를 썰어 넣고 장시간 끓여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분홍색, 연두색 등으로 염색을 해서 생산하는데 기계 한 대에 여직공 하나와 남자 기술자 한 명이 배치되었다.

직조공장 부근을 지날 때면 딸딸이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은방견 제품을 생산하는 여직공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당시 생산된 완제품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어 공장 숫자는 나날이 늘어났다.

1949년 7월경 영변 직조공장에 외사촌 누이 ‘성예순’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누이의 소개로 단양고등학교 뒤에 위치한 ‘경성직조공장’에 기술자 후보로 취직했다. 직조기 3대를 갖춘 공장이었고 주인영감이 임시 기술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70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당시 주인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사장님의 부인은 월남 후 사망했고 슬하에 19세 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일찍이 평양 출신 며느리를 얻어 손자를 두었으며 결혼 한 아들은 단양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보다 2살 위 선배인 셈이다.

사장님은 항상 한복 차림에 옥동자인 손자를 업고 공장에 나타났다. 그의 며느리도 함께 출근해 공장의 뒷바라지를 하곤 했다. 우리 공장 여공들도 늘 딸딸이 장단에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곤 했다. 그러다 가끔은 내게도 노래 한 자락을 청했지만 나는 매번 사양했다.

입사한 지 3년여가 지날 때 쯤, 꾸준하게 관찰하고 열심히 훈련한 덕에 나는 준 기술자로 능력을 인정받아 사장 영감의 신임을 얻게 됐다. 어느 정도 공장 생활이 안정되고 사내 분위기도 만족해 나 역시 자신감이 생겼다. 여공들은 모두 처녀들인데 두 명은 나보다 한 살 위고 한 명은 동갑내기였다.

어느 날, 딸딸이 소리에 장단을 맞춰 신나게 유행가를 부르다가 내게도 주문이 들어왔다. 내가 콩쿨대회에서 입상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거절을 못하고 ‘홍도야 우지마라’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 날 이후 총각 기술자의 인기는 점점 더해갔다.

그런데 사장님 며느리가 은근히 내게 접근하면서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옥수수 강냉이를 몰래 주기도 하고 사탕이나 누룽지를 종이에 싸서 갖다 주기도 해 민망했다. 결국엔 공장 안에 아무개 엄마가 기술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가급적 그 며느리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며느리 행동을 눈치 챈 사장 영감이 출근하는 며느리의 출입을 차단했다.

어느 날에는 신랑이 자기 마누라를 두들겨 패서 얼굴에 상처를 입혀 시커멓게 멍이 든 채 공장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이 며느리를 호되게 야단을 쳐서 쫓아 보내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쯤 되자, 사장 영감이 내게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리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 빠른 나는 진로를 새롭게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장을 옮기려고만 한다면 환영 받을 곳이 있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해 11월에 나는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경성직조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촌누이가 있는 대명직조공장의 기술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기술자의 월급은 기계 숫자에 따라 결정되는데 나는 상급 수준의 임금을 받기로 했다. 그 무렵 나는 공장 관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여공들에게도 제법 인기를 받는 축에 속했다.

1950년 초, 아버님이 잘 알고 지내시는 단양의 유지이자 재력가인 권수정씨가 찾아와서 자기 집 마당에 직조공장을 세우기로 했다면서 아버님께 나를 기술자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미 여공들은 확보됐는데 기술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채용조건도 좋았다. 월급을 대명보다 조금 더 주고 공장 내에 거처할 방도 마련해주고 식사까지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해 2월 또 다시 공장을 옮겼다.

그 무렵 낮에는 공장기술자로 일하고 밤에는 새벽까지 통신강의록을 붙잡고 주경야독하는 씨름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여섯 명의 학교친구들이 공장을 견학차 방문했다. 마침 여공들이 신나게 유행가를 부르며 작업을 할 때였다. 그 광경을 본 친구들이 “봉가야, 이제 보니 너는 꽃밭에서 놀고 있구나.” 하며 놀려댔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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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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