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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6.25전쟁 학도병의 회고록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올해로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 국가유공자 훈장을 포장한 고(故) 조용학님의 회고록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연재합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가난과 결핍의 시간을 거쳐, 공산화를 막아내고 산업화시대에 온 몸을 불살라 가족과 조국을 지켜내며 한계 상황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영접한 고인의 일기를 후손들이 정리한 회고록에서 발췌, 매주 한 편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나는 충청남도 단양군 하절리 33번지에서 출생했다. 한양 조씨 가문 4대 독자였던 아버지 조사운과 어머니 성난이 슬하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19세에 어머니는 13세에 결혼하셨다. 슬하에 6남 1녀, 7남매를 두셨다.

넷째인 내 위로는 형님 두 분과 누님이 한 분이 계셨다. 큰 형은 운학, 둘째는 윤학이다. 그리고 누님 말례 다음 네 번째가 나다. 아래 동생은 용국, 여섯째는 수영이며 일곱째는 민학이다. 첫째 운학형과 윤학형은 작고하셨고 바로 위 외동딸인 누님은 첫돌이 지나 병사했다. 2012년 현재 내가 맏이인 셈인데, 남동생 셋은 고향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일제 시대인 1932년 8월 14일에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놋재’ 두부공장으로 가서 가장 먼저 줄을 서서 비지를 배급받아 왔다. 우리 식구들은 자주 배급받은 비지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되면 담배 배급소에 가서 아버지가 피우는 담배를 사오곤 했다.

아버지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미장 기술 노동자였다. 그나마도 그 일감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가정 형편은 빈곤을 면치 못했다. 가족 모두 하루 한 끼를 거르는 건 다반사였다. 어떤 날은 종일 굶기도 했다. 아침을 굶고 등교하는 날도 많았다. 집이 가까워 점심때가 되면 달려가 부엌에 있는 솥뚜껑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솥뚜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러면 바로 뒤돌아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밥 굶기를 부잣집 밥 먹듯 한다’는 말은 우리 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아버지는 노임으로 현금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주로 보리쌀이나 밀가루를 받아 오셨다. 그나마 외상으로 일을 하시니 집안에 돈은 씨가 말랐다. 아버지가 뿌려놓은 외상값 수금은 내 몫이었다. 아버지는 참 야박하지 못하셨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양반이라고 추켜세웠지만, 가난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눈에는 무능한 분으로 보였다.

형제들 일도 떠오른다. 우리 6형제에게는 제각각 독특한 별명이 있었다. 운학형은 ‘학’이고 윤학형은 짱이라고 불렸다. 나는 ‘봉가’로 불렸으며, 용국 동생은 두꺼비, 수영이는 ‘심통’이로, 막내 민학이는 ‘아가’로 불렸다. 아마도 성격과 기질에 비추어 이런 별명이 붙었을 터이다. 형님들 별명은 그 까닭을 모르겠지만 특별히 두꺼비 용국은 두꺼비처럼 네 발로 잘도 기어 다닌다고 그렇게 부르던 기억이 난다. 수영이는 어릴 때부터 불평이 없고 착하다고 ‘심통’이라 불렀고 ‘아가’로 불리던 민학이는 제일 막내라서 장성한 후에도 6.25사변까지 그렇게 불려졌다.

속담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했다. 먹는 걸 훔치는 건 죄도 아니라며 때리지 말라고도 했다. 적어도 그 시절엔 그랬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파 견딜 수가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숯거리 참외를 서리하여 굶주린 배를 채운 기억도 난다. 또 한번은 비 오는 날 요리집 문 앞 구정물통에 떠 있는 호박 속을 건져 먹기도 했다. 하필 그 장면을 큰형님에게 들켜 심하게 맞은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매를 맞아도 고픈 배는 채우고 볼 일이다. 달이 뜬 밤에는 객사 모퉁이에 있는 감자밭을 서리했다. 그리고는 개울가 바위에 감자를 갈아 비릿한 날감자를 씹어 먹던 기억도 새롭다.

한번은 ‘호랑이 할머니’네 참외를 서리하다 들키는 바람에 도망치다가 바지가랭이가 찢어진 적도 있었다. 지나고 보면 모든 순간이 애틋하다. 눈을 감으면 아득한 옛 일이지만 흘러간 영상처럼 지나가는 순간들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다. 내 어린 시절은 어느 한 순간도 절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굶주리며 어렵게 살던 학창시절에 고마운 분들도 계셨다. 우리 반을 담임했던 일본인 ‘후까야마’ 선생님과 한국인 ‘오하라’ 선생님은 가끔 점심시간에 나를 호출하셨다. 그러고는 도시락 김밥을 나누어 주셨다. 정말 꿀맛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맛있게 먹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 지금도 눈시울이 적셔진다.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된다. 어느 날 아침 옆집 친구 ‘수덕’이 어머니가 두부 한 모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그 날도 우리 식구들은 굶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수덕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아이고 봉가가 목이 떨어지고 눈이 쑥 들어가 쓰러지겠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으며 “우리 집에 가서 수덕이하고 아침 먹고 학교 가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날 아침 수덕 엄마가 차려준 하얀 쌀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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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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