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나는 자주 즉석 과제를 냈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 목록을 적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 교회에서 (목사, 주교, 또는 교사로) 전담 사역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이 경험은 많은 학생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이 적은 그런 신학자 목록에서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웨슬리, 에드워즈, 스펄전, 그리고 킹과 같은 이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이 꼽은 신학자 중에 교회 전담 성직자로 일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라고 말했을 때, 강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학생들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차렸다.
변화
오늘날까지 기독교 사상을 꾸준하게 알리는 교회 역사 속 인물 대부분은 주로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또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책도 썼다.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시간을 교구민과 함께 보내며,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도록 돕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수고에 복을 빌어주었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상황이 변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목회자를 가장 중요한 지적 안내자로 바라보지 않는다. 전문 학자들과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이전에 성직자들이 했던 역할을 빼앗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이제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라고 하나님 백성에게 권면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하는 목회자가 이런 현실을 핑계 대면서 그 책임을 포기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하나님 백성의 지성을 새롭게 하고 가르치는 일을 목회자가 다시 한번 주도할 수 있는 현대적 방법이 있다.
원인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해체와 함께 현대식 연구 대학이 크게 부상하고 또 기술 변화가 전 세계의 민주화 추세를 촉진하면서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성직자의 문화적 권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래전 루터와 에드워즈는 법적으로 공인받은 지적 지도자의 지위를 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신도는 그들의 교육을 받고 또 그들의 교육 사역을 지원하는 일을 마땅히 (때로는 의무로) 해야 했다. 사람들의 생계와 미래는 그들의 세계, 곧 국가와 교회의 틀에 얼마나 순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시민의 일상에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마치 잘 짜인 식단에 따라 끼니를 채워주듯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교회 구조가 사라지자 평신도는 더 이상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교회 지도자는 대중이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자기 스스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굳이 교회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싫어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주일 아침 예배로 데리고 와서 목회자가 준비한 지적 노력과 신학적 자양분을 섭취하도록 설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소재를 마치 건강에는 해롭지만 맛은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가공하여 군중을 끌어들이고 붙잡아 두는 게 더 쉽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가 이처럼 패스트푸드점의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진짜 중요한 삶의 질문을 고민하는 교인들은 이제 목사가 아닌 전문가를 찾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자양분을 얻기 위해 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을 찾는다. 미디어로 큰 인기를 끄는 학자나 인기 지식인의 지혜를 구한다.
이러니 일상의 제자도와 증언은 처참해졌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신학적으로 문맹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을 먹여 살리라는 부름을 받은 이들이 정작 그들을 신학적 영양실조에 빠트렸다.
책임
지금 교회에는 교인을 신학적으로 인도할 목사가 필요하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히 5:12).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걸 원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난 2세기 동안 현대식 대학이 이룬 학문의 전문화와 인간 지식의 성장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축복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목회 지도자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할 학교는 항상 필요하다. 특히 신학교는 히브리어, 헬라어, 교회사, 철학, 심리학, 해석학, 다문화 연구 등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관련된 주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풍부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이런 학문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꼭 필요로 하는 교육을 학계나 기타 비종교적 사상가에게만 맡겨놓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하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설혹 기독교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정통을 가볍게 여긴다. 그들의 연구는 주로 세속적인 이유로 활력을 얻는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교내 승진과 정년 보장, 또는 미디어를 통한 명성과 재산 증식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그들에게 별다른 동기가 되지 않는다.
신학교 교수가 목회-신학자(pastor-theologians)를 섬기는 종이기를 자처하고, 목회-신학자가 앞장서서 하나님 백성을 신학적으로 일깨우는 날이 오도록 함께 힘쓰자. 목회자는 제너럴리스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 내내 항상 전문가들이 찾아낸 것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인생의 가장 큰 질문과 씨름하는 교인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 신앙과 관련한 모든 것을 다 교인에게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신앙에 편식은 있을 수 없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도록 서로 격려하자.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달렸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Why the Church Needs Pastor-Theologians
더글라스 A. 스위니 Douglas A. Sweeney | Beeson Divinity School(Birmingham, Alabama) 학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경주해(Edwards the Exegete)를 비롯하여 여러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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