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예상된 기독교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아, 교회는 진리 사수
비서구권교회의 변화 바라는 서구교회의 태도, 제국주의적 편협함
20C 초 보수신앙의 거두 메이첸, 체스터튼의 책 여전히 출간돼
가스펠프로젝트의 편집장 트레빈 왁스가 최근 릴리젼뉴스서비스(RNS)에 기고한 ‘기독교는 성윤리를 바꿔야 하는가? 역사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라는 글을 정리, 소개한다. <편집자>
기독교가 21세기에 걸맞게 도덕 기준을 새롭게 바꾸고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100년 전의 메아리를 듣는다. 당시, 기독교의 변화에 대한 요구는 도덕성보다는 기적에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동기는 비슷했고 결과는 오늘날에도 교훈을 주고 있다.
20세기 들어 세상은 과학 시대에 새로운 발견이 이뤄지듯 그에 걸맞는 기독교인의 믿음을 받아들이라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요청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 속의 모든 기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이 견해는 계속 이어져왔다. 기적에 대한 성경적 증언들은 스스로 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100년 전에도 성경의 기적 폐기 요청
기독교가 이같이 황당한 미신같은 신앙에서 벗어나도록, 많은 교회의 리더들은 기독교의 알맹이(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서로 사랑함)를 기독교의 껍데기(하나의 좋은 문화적 관점으로 본 기적 이야기들)와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의 도덕적 핵심을 계속 유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허구로 여겨지는 성경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황을 애써 외면해왔다.
이러한 태도가 확산되면서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영적인 의미, 즉 그분은 선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으로 재해석 됐다.
예수님이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의 이야기들은 도덕적인 이야기로, 실제로는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아 자신의 것을 나누어 먹게 된 것이라고 왜곡됐다. 동정녀의 출산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비서구세계의 교회들은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명확한 성경의 증언들과 교회가 항상 믿어왔던 것들을 거부했다는 것을 듣고 경악했다. 북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확산된 것은 기독교의 중심을 되찾으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또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버려야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복음주의 운동은 이에 거절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J. 그레샴 메이첸은 “고쳐 만든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식으로 겉치장한 대체 종교”라는 것을 입증했다.
동정녀 출산도 믿지 않는 서구교회
시간이 흐르며 기독교의 핵심을 보존하고 그 껍데기를 버리려는 시도는 정 반대의 효과를 내었다. 기독교의 핵심을 전달하는 특수성은 사라졌고 교회의 의식절차라는 껍데기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몇몇 교파의 주교들이나 목사들이나 신자들이 믿음의 핵심 교리들은 드러내놓고 거부하면서도 예배에 참석하거나 특정 의식에는 참여하는 이유다. 이 코스를 따르는 교파는 급격하고 꾸준하게 쇠퇴하고 있다.
백 년 뒤, 교회는 다시 한 번 요동치고 있다. 이번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구별된 성적 윤리를 재고해 보라고 요청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읽는 신약의 많은 도덕적 지침들은 다른 문화적 관점으로 쓰여졌으며, 오늘날엔 더 이상 권위를 부여하기도 어렵고 적절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가 다음 세기에도 생존하고 번창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오래된 금지 규정들(혼외정사, 동성애, 성별의 의의 등)은 한쪽으로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비서구권에서는 지난 2000년 간 모든 곳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여 왔던 기독교적 도덕 수칙들을 거절하자는 서구교회의 열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혼과 성에 대한 사회의 새로운 신념을 받아들인 서구의 교회들은 그들 자신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 세계의 교회는 그들을 “배교자”로 본다. 동시에, 급격하게 소멸하고 있는 서구의 백인 교회들이 비서구권의 교회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제국주의적 편협함의 절정이다.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나 순교하고 있는 곳들을 포함한 비서구권 교회는 왜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와 기독교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결혼의 의미에 대한 성경말씀을 어떻게 오해해 왔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서구세계의 익숙한 품 안에 안주한 상태라면, 세계적으로 기독교 교회들이 역사의 궤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그 반대다.
한 세기 전, 근대주의자들은 자연주의(모든 자연현상은 과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는 철학의 한 분파)의 승리가 기독교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었다.
개혁의 선봉에 서서 스스로가 기독교의 필연적인 미래의 중심점이라고 생각했던 리더들에게는 아주 흥분되는 일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황이 달랐다. 당시 편협하다고 비난받던 J. 그레샴 메이첸(자유주의신학에 물드는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이나 영국의 기독 작가 G.K 체스터튼과 같이 전통적으로 탄탄한 사람의 책이 아직까지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그 시대 흐름에 동조하던 사람들의 이름은 현재 찾아볼 수도 없다.
결혼, 성별 그리고 성의 목적에 대한 현대 사회의 재정의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설득하여 반드시 따르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요즘 서구교회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22세기로 뛰어 넘어가 본다면 과연 무슨 결과를 보게 될지 궁금하다.
아마도 우리는 남미와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교회가 북미와 유럽의 교회들을 뛰어넘는 것을 볼지 모른다. 교회는 시대를 반영하기보다 세상에 진리를 제시하며 세워져왔다는 한 세기 전의 그 교훈이 여전히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GNPNEWS]
복음기도신문 국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