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51)
흉노와 돌궐, 알타이언어군, 셀주크제국과 오스만제국, 동로마제국(비잔틴의 멸망), 이슬람교, 모슬렘 등은 지금의 튀르키예(튀르크)공화국을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이 중에서도 이슬람교는 과거 셀주크제국이 아랍 이슬람과 만나고, 오스만제국을 거쳐 오면서 발전한다. AD 7세기에 아랍인들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교는 오스만제국 안에서 수많은 학파와 종파로 나뉘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렇다면, 튀르크인들이 언제 모슬렘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오스만제국(A.D. 1299~1922)[1]의 전신인 셀주크제국 시대(A.D. 1077~1308)로 보는 이들도 있고, 또는, 10세기경에 다른 튀르크 국가인 카라한 국(A.D. 814~1212) 때 이미 집단 이슬람 개종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셀주크제국의 뒤를 이어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인이 된 오스만제국은 이미 제국 안에 완성되어 있던 이슬람교의 안정적 체제 속에서 제국의 정치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태동은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으로 멸망한 이슬람 제국(A.D. 661~1258)의 뒤를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었으며, 후에 수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대제국으로 부상한 오스만제국은 자연스럽게 전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칼리프)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다.
튀르크인들은 7세기 중엽 아랍 이슬람군의 동방 정복과 중앙아시아로의 진출로 인하여 처음 이슬람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아랍 이슬람군이 642년 니하반드[2]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킴으로써 쉽게 튀르크족과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후 튀르크족 사이에 이슬람이 전파된 시점과 장소는 8세기 초 트란스옥시아나(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지역)에서였다.
당시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는 튀르크인들의 이슬람화는 매우 미비하였다. 아랍인은 튀르크인들에게 이슬람 사원을 강제로 건축하게 하고, 개종하지 않은 튀르크인들에게는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이슬람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세금 면제와 공직 채용, 급료 인상의 혜택을 부여하였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튀르크인들에 대해서 국가행정 요직 기용, 인두세 폐지 등의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당시 튀르크인들에게 상당히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러나, 튀르크인들의 이슬람화는 751년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와 중국의 당나라 간에 있었던 ‘탈라스’ 전투에 아바스 왕조의 용병으로 튀르크인들이 참전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튀르크인들의 이슬람화는 단순한 이슬람 신앙 전파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튀르크인들의 이슬람화에서 결정적인 동기는 아바스 왕조의 당시 정치적 압력과 이에 대한 튀르크인들의 강한 생존 본능에 따른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앙을 수용한다는 것은 언제나 개인적이고도 신비로운 체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튀르크인들의 집단 개종이 성공한 원인
이후 전체 튀르크인들의 빠른 집단적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튀르크인들의 집단적 이슬람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튀르크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기들의 전통과 정신이 이슬람이 가진 것과 유사했다는 점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튀르크인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그들의 천신(탱그리) 사상[3]이 단일 신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알라’ 사상과 유사했다.
2)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의 강한 공동체 전통이 이슬람 사회와 유사했다.
3) 튀르크족의 진취적 정복 정신이 이슬람의 지하드 정신과 유사했다.
4) 법질서나 도덕규범의 엄수를 강조하는 이슬람의 도덕관이 튀르크족이 가지고 있었던 고유의 전통 관습인 ‘퇴레(Töre)’와도 일맥상통했다.
이후, 튀르크인들의 이슬람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9세기 중반에는 이슬람 국가와 국가적인 경제적인 접촉과 교류가 점차 빈번해지면서 튀르크 민족의 이슬람은 가속화되었다. 특히,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금 튀르키예공화국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오우즈 튀르크족이 이슬람화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11세기 초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출한 셀주크 튀르크인들이었다.
이 셀주크 튀르크인들은 코냐(로마 제국 당시 이고니온)를 수도로 제국을 건설했으며, 당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 안에 수많은 땅을 정복해 나갔다. 이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공국 중 하나인 ‘오스만’이라고 불리는 공국이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인 튀르크인들에 의한 오스만제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다시 그 뒤를 이어 지금의 튀르키예공화국이 자리 잡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비잔틴 정복이 가진 역사적 의의
당시 오스만제국에 의한 비잔틴(동로마) 제국 정복은 4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1) 세계 역사 가운데 중세에서 근세로의 시작.
2) 천년의 기독교 문명에서 이슬람 문명으로의 전환.
3) 유럽의 동방 문화 수용으로 르네상스와 지리상의 발견 시대 도래.
4)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제국 술탄들의 지도자 부상.
특히, 위의 4가지 역사적 의미 가운데에서도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비잔틴 제국의 정복을 계기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칼리프) 자리를 얻게 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동안 그것이 상징적이든 아니든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칼리프 직은 이슬람의 태동 이후 8백여 년 동안 이슬람 제국을 중심으로 아랍 모슬렘들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상징적 리더십이 비록 같은 모슬렘이지만 비아랍계인 오스만제국 안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아랍 모슬렘들에게는 매우 아쉽고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튀르크인들에게는 매우 자랑스러운 사건이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은, 오스만제국 황제인 술탄에게 있어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을 책으로 묶은 하디스에서 유언으로 당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비록 자기가 아랍 모슬렘은 아니었지만 충실한 비아랍 모슬렘으로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을 거룩한 종교적 사명의 완수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성공적인 임무의 완수로 말미암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자리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술탄 자신도 그것을 일거양득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 호에 ‘튀르키예공화국이 가진 이슬람의 특성’이 계속됩니다.)
[1] 오스만제국은 시조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로마의 소아시아) 반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적이며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1922년을 끝으로 본다.
[2] 고대 니하반드(Nihavand) 왕국의 수도이며 현 이란의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로 알려져 있다.
[3] ‘탱그리’라는 뜻은 현 튀르크어로 ‘TANRI’라고 하며 ‘신(神)’을 뜻한다. 이는 알타이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어원에서 유래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의 ‘단군’이라는 말도 알타이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tengri)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 탱그리 사상은 카자크, 몽골, 튀르크족이 믿는 하늘 숭배 사상이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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