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 앞의 그리스도인과 십자가 (2)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함께 참예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실상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소멸하는 빛(radium)’은 항상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마비(Mabie: 1847~1918, 미국 목사, 16세에 무디를 만나 영향을 받음.)가 말하는 ‘죽음-부활의 내포적 과정(death-resurrection mid-process)’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구주의 부활 권능이 역사하는 곳에는 십자가도 역사합니다. 십자가의 소멸하는 능력(radio-active power)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 권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함께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귀도 일종의 왕좌를 제안하는데, 그 왕좌의 왕은 ‘자아’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좌는 주님의 보좌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계 3:21).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아를 폐위시켜야 합니다. ‘자아’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육’은 십자가의 ‘소멸하는 능력’ 안에 묶어야 합니다.
밧모섬의 사도 요한이 은혜로 목도한 계시록의 광경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계4:1)을 보고, 승리하신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를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놀라운 말씀은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 맥락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보좌가 십자가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장에 있는 듯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모여들어 새노래를 부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이것은 갈보리의 마침을 하늘에서 영원히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학자가 시편 96편 10절을 “여호와께서 나무에서 통치하시니”라고 풀이한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하늘은 하늘이 아니고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 중심 신학을 설파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놀랍게 확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믿는 이가 보좌와 생생한 연결을 맺고 있다는 복된 확정을 보여줍니다.
C. H. 콕스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부활 생명은 십자가로 기울어져 있다.”
믿는 이는 보좌 앞에 사는 특권을 많이 누리고 그리스도 예수 한 분으로 말미암는 삶으로 왕 노릇 하면 할수록, 바울 사도가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더 절실하게 깨닫고 더 뚜렷하게 알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마음과 같지 아니하면 보좌 앞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깊이 누리지 못합니다.
마땅히 같아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온전히 적용되지 않은 영광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영광은 영원히 오직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광을 누리는 놀라운 삶의 열매는 마땅히 갈보리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갈보리의 사랑은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갈보리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골고다의 모습으로는 아닐지라도 마음으로부터는 골고다로 재현되어야 합니다. <F. J. Huegel – 룻선교회 제공>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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