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꿈을 꿨다. 평양의 한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꿈이었다. 눈을 뜨니 현실은 꽃제비 신세였다. 배고파서 북한의 국경을 넘나들다 북한 회령보위부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성경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행을 앞두고 있는 한 형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들었다. ‘살아나가서 이곳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 소년은 청년이 되어 또 다시 탈북, 중국과 태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오게 됐다.
이사야서 말씀묵상 중 흉악의 결박에 묶여있는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 안내서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 책을 썼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연어의 꿈’(예영B&P刊, 2013)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나는 함경남도 단천시에 속하는 시골동네에서 태어났다.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외할머니 댁에서 살게 됐다.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밥값을 하기 위해 산과 밭에서 나무와 이삭을 구하러 다녔다. 얼마 후 어려운 외할머니 댁의 사정으로 다시 집을 떠나야했다.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어머니는 재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새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몇 번을 이혼해야 했다. 그리고 네 번째 남편을 만났다.
새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김일성 초상화 틀을 닦다가 실수로 액자를 깨뜨렸고, 그 일이 옆집 아저씨에게 발각되어 그날 밤에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정치범가정이 되어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가 없게 됐다. 그래서 새아버지는 나를 열심히 공부시켰다.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죽고, 공산당은 ‘고난의 행군’을 선포했다. 이 무렵 국가에서 나오던 배급이 끊어졌다. 배급에만 의존하던 인텔리들은 고지식하게 굶어죽기도 했다. 그러나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거나,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은 사람은 살아남았다.
당시 굶주리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도 굶어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 집합 종소리가 들렸다. 전교생이 함께 총살하는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선 곳에서 세 개의 말뚝 앞에 사람이 세워져 있었다. 소를 도적질한 사람, 전동기선을 끊어 팔아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향하여 군인들이 총을 쐈다. 너무나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총살을 목격했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동물처럼 먹는 것에 집착하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지는 것 같았다. “철(가명)아 풀을 뜯으러 가자. 먹어야 산다.” 어머니가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따라설 힘이 없었다.
어머니는 홀로 나가서 딸기나무 순, 능제(돼지가 잘 먹는 풀) 등을 뜯어오셨다. 뜨거운 물에 데운 풀과 소금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풀에 소금물을 찍어 먹어보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풀독으로 눈과 다리가 부어 있었다. 거울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세 번 부었다가 내리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할 때, 기숙사 생활을 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식권을 주고 가셨다. 얼마 뒤 그 할아버지는 굶어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할아버지의 목숨과 우리 목숨을 바꾼 셈이다. <계속> [GNPNEWS]
강디모데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5번의 새아버지를 만나 살던 중 식량난으로 탈북,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됐다. 현재 대학 재학 중이며 꿈은 자신과 같은 고아(꽃제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