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상, 음악 목록에서 크리스마스 인기곡을 클릭하는 순간 당신은 정신적 그리고 정서적 고통을 만날 것이다.
조금의 경고와 설명도 없이 당신의 귀에 울리는 건 각종 캐럴이다.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에서 “Silent Night”까지, “Blue Christmas”에서 “Joy to the World”까지, 그리고 “Grandma Got Run Over by a a Reindeer”에서 “Lo, How a Rose E’er Blooming”까지 말이다.
현대 문화에서 성탄절은 독특하다. 뚜렷한 기독교적 내용도 있지만 동시에 온갖 잡다한 문화의 수많은 전통이 축적되어 마구 섞여 있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문득 혹시라도 오래된 기독교 캐럴과 최근 인기 있는 캐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옛 노래는 종종 죽음을 언급하는 반면, 요즘 노래에는 아예 죽음이 빠져있다.
성탄절 노래 속에 담긴 죽음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곧 오소서 임마누엘(O Come, O Come Emmanuel):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어둠의 구름 사라져
죽음의 그림자 사라지리
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세상 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기뻐하며 찬송하라(Good Christian Men, Rejoice):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평화! 평화!
우리 구원 위해 주께서 나셨네
한 송이 장미꽃 피었네(Lo, How a Rose E’er Blooming):
부드러운 향기의 꽃,
영광스런 장엄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없애시네
진정하신 사랑, 진정하신 주님,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의 모든 짐을 나눠지시는 구세주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옛 작사자가 강조한 것은 죽음이었다. 죽음이 없이 그들에게 축하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성탄절을 더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을 피한다. 우리가 축하하는 성탄절은 죽음이라는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은 죽음
오래된 노래와 요즘 노래 사이의 차이는 중요한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옛날 노래가 나오던 시절에 죽음은 어디서나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죽음은 쉽게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18세기 말, 미국에서는 다섯 명 중 네 명이 일흔 살 이전에 사망했다. 평균 수명은 삼십 대 후반이었다. 요즘 평균 연령은 거의 여든 살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친구, 이웃들에게 둘러싸인 채 집에서 죽었다. 1980년까지 사망자의 17퍼센트만 집에서 죽었다. 요즘 들어 호스피스 치료 덕분에 가정에서 죽는 비율이 다시 증가 추세이다. 친숙한 장소에서 만나는 친숙한 사건이었던 죽음이 점점 더 사람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위생적이고 전문화된 기관에서 만나는 낯선 사건으로 바뀌었다.
단지 죽음의 경험이 덜 친숙해진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금기시되어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아예 추방되었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이러한 변화를 “잔인한 혁명”이라고 부른다. 죽음이 “과거에는 너무 편재하다 보니 친숙했다. 그런 기억은 이제 지워지고 사라질 것이다. 죽음은 이제 수치스럽고 금지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85).
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억누를까? 아리에스는 이 금기가 행복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마치 “슬픔이나 지루함의 원인을 피하고 절망 속에서도 항상 행복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집단의 행복에 이바지할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행복이 도덕적 의무라면 슬픔은 도덕적 실패가 된다. 아리에스는 이렇게 썼다. “아주 약간의 슬픔이라도 징후를 보이는 순간 행복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다. 슬픔은 행복해야 할 사회를 위협하며, 따라서 사회는 존재 이유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
행복해야 할 의무에 관한 아리에스의 생각이 옳다면, 왜 성탄절에 죽음을 덜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대화는 죽음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숙고하기는커녕 좋지 않은 뒷맛만 남긴다. 심지어 반사회적인 주제로도 보일 수 있는데, 단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기
그러나 아무리 이 주제를 피하려고 애써도, 우리는 모두 매일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삶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감은 결국 죽음을 바라보게 한다. 행복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삶을 직면할 때마다 죽음이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좋은 것일수록 결코 오래 가지 못하는, 모든 좋은 것이 결국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상이 주는 고통 앞에서 죽음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문화가 되어버린 즐거운 성탄절을 비롯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피한다. 성탄절 쇼핑, 빵 굽기, 파티 및 선물 나누기, 그리고 지나간 좋은 세월을 회상하며 희망하는 올해의 완벽한 성탄절, 그 자체로 다 좋은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방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당신은 성탄절을 전도서 2장에 나오는 설교자의 실험처럼 기이하게 들리는 한 달 동안의 자가 치료 공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전 2:1, 10). 전도서 저자는 집을 지었고 사고 싶은 것을 다 샀다. 그는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겼고 행복한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직면했고, 누구나 만나는 결과 앞에서 섰다.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 2:11).
성탄절 직후에 느낀다는 우울증에 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그건 놀라운 게 아니다. 돈 주고 산 행복은 결코 죽음의 그림자 속 삶의 진실과 맞설 수 없다. 그 어떤 선물도 죽음이 가져오는 정체성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 어떤 성탄절 휴가도 죽음이 가져오는 일(work)의 좌절감과 허무함을 덜어주지 못한다. 그 어떤 감상적인 노래도 죽음이 가져오는 이별의 고통을 달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무덤에 일 년 더 가까워진 몸으로 새해를 맞는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셨다. 기뻐하라.
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다르게 보낼 방법이 있다. 가장 오래된 캐럴은 그 길을 알려준다. 죽음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상 속 흐릿한 구름 같은 약속을 지금 현실 속 일상적인 문제에 적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이 주는 기쁨을 더 누릴 수 있다.
오래된 성탄절 노래가 죽음을 크리스마스와 연결했을 때, 거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이사야서 9:2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그리스도의 빛은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성탄절 축하 행사를 굳이 두려움과 좌절, 슬픔과 분리할 이유가 없다. 진실을 직시하자. 지금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 정직하자. 그리고 기뻐하라. 임마누엘이 당신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는 재림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복음기도신문]
매트 맥컬로우 Matt McCullough | Trinity Church(Nashville, Tennessee) 목사, Remember Death: The Surprising Path to Living Hope의 저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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