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나의’헤페츠'(strong will, 병든 자아의 강렬한 원함)를 포기하는 것
한글 성경은 시편 1편 2절 말씀을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 성경의 표현은 조금 더 선명해 보인다.
“참으로 그의 ‘헤페츠’가 여호와의 율법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온 방을 시편 히브리 성경 구절로 도배하여 앉으나 서나 언제나 말씀을 암송했다. 이런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비록 칼빈 만큼은 아닐지라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으로 인하여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내면에 스며들어 나에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자아는 말씀을 거부한다. 그리고 강력한 자기의 뜻, 자기의 원함을 따라간다.
시편 1편 2절의 히브리 전치사 ‘ב’(베트)는 ‘-안에(into)’의 의미도 있지만 ‘통과(through)’의 의미가 있다. 나를 통과해야 그 복음이 나에게 실제가 된다. 나를 통과하지 못한 복음은 나에게 복음이 아니다. 본문에 기록된 핵심 단어인 헤페츠는 ‘강하게 원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시편 40편 8절에는 ‘원함’의 의미를 지닌 두 단어가 쌍(word-pairs)으로 사용되었다.
‘원함’(will)에서 보다 ‘더 원함’(more strong will,헤페츠)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원함, will, 라촌) 행하기를 원하오니(헤페츠) 주의 법이 나의 심중 에 있나이다(시 40:8)”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시인의 기도이다. 당신의 마음 중심의 깊은 내면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잡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원하지(헤페츠)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원하지 아니하시고(라차)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원하시는도다(라차) (시 147:10-11)”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쌍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위의 시편 말씀은 일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파르스 프로 토토’(Pars pro toto) 문학기법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은 누구의 그 무엇에 관심이 있지 않으심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어떠함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이런 자를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내가 너희를 원하지(헤페츠)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라차) 아니하리라(말 1:10b)” 여기에서 받다, 열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원하다’는 의미다. 열납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즐거워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나의 원함이 주님의 원함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실제 되어야만 가능하다. 유대인들의 70인역(LXX)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But(rather) his will is in the law of the LORD(JB), Rather his will(qe,lhma) is in the law of the Lord(LXX). “오히려 그의 원함이 여호와의 율법 안에 있느니라”
복음이 실제가 된 자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대로 깊은 심령 속에서 이런 생명의 고백이 흘러 넘쳐 나오게 된다. ‘헵시바’(사 62:4) 히브리어로 ‘헤프치-바’
“나의 원함이 주님 안에 있나이다”[GNPNEWS]
김명호 교수(복음기도신학연구소) 필자는 이스라엘에서 구약을 전공하며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언어임을 깨닫고 현재 성경언어학교를 통해 믿음의 세대를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