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번 시간에 다루었던 성경 해석의 방법을 가지고 실제적인 해석을 할 차례이다.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살펴볼 예정인데, 도입부인 1장6절에서 9절을 같이 보기를 원한다.
1. 역사적 문맥 파악하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 편지가 약 2000년 전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 당시의 시대 배경과 저자와 수신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지금 우리의 상황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 한다면 성경의 문맥이 제공하는 중요한 포인트들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저자가 이 글을 쓴 데에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이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의 인사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 글에서 저자 본인을 사도 바울이라 명시하는 것(1:1-3)과 그의 필체, 그리고 여러 초대 교부들의 증언을 통해 확증된다. 그리고 서신서 제목만 보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수신자가 “갈라디아”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갈라디아는 그 당시 로마의 속주(Province)로써,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을 가리킨다. 갈라디아는 사도행전 13-14장에 나오는 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지칭하는 넓은 단위의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떠났을 당시는 AD 47-49년이었고 , 갈라디아서를기록했던 때는 AD 50-51년 정도로 추정됨을 통해, 교회를 세운지 2~4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데에는 갈라디아 교회에 어떠한 큰 문제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는 유대주의자(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변질 시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 “믿음 뿐만 아니라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바울이 처음에 전했던 참복음(믿음으로만 구원)을 다른 복음(행위 구원)으로 바꾸려는 이단적 행위였기 때문에,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성경의 중심 목적 찾기
역사적인 배경을 파악했다면, 이제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을 차례이다. 서신서는 권면하는 책으로써 대개 저자가 수신자에게 책망과 훈계, 교리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실질적 적용점을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해 두고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읽을 때에는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반복적으로 읽은 뒤, 바울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수신자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세워진 지 2~4년 밖에 되지 않은 교회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어투가 조금은 강해 보이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한 상황은 무엇이며, 바울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울이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울의 강한 훈계는 주님의 사랑(십자가 복음)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컨셉이나 교리를 살펴보길 바란다.
이를 살펴보면 “복음” “다른 복음”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 “거짓 가르침 또는 교리” “믿음” “율법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 “상속자-유업을 이을 자” “아들” “육체의 열매” “성령의 열매” “할례” “십자가” 등이 있다.
종합해 보면,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율법의 행위(믿음+할례)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처음 들었던 순수한 복음(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에 머물러 있음으로 육체의 일을 쫓지 말고, 성령님을 따라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을 권면하는 서신서 임을 알 수 있다.
문맥 파악하기(언어적인 접근)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1:6-9은 1:1-5과 1:10-24 사이에 있는데, 이를 3개의 문맥 또는 문단(주제의 최소 단위)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는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음)
1장 6~9절을 감싸고 있는 앞 문단(1:1~5)은 바울의 사도성을 증명하는 인사말이고, 뒷 문단(1:10~24)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출처와 그의 회심 사건,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 전까지(AD 49년, 갈2, 행15) 그가 행했던 사역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앞 문단에서의 바울의 따뜻했던 인사(1:2~3)가 6절에서 갑자기 강한 비판의 어조로 바뀌는 것을 볼 때, 갈라디아 교인이 당시 처한 상황이 굉장히 급박하고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뒷 문단에서 바울이 피력하는 진짜 복음(2:10~12)의 출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점을 통해 “다른 복음”은 인간이 만든 거짓된 교리(진리가 아닌)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해석하기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1:6)
바울은 이 구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의아한(놀란) 심정을 표현한다. 그가 말하는 ‘속히 떠났다’는 것은 참 복음에서 돌아섰다는 의미이다. 충성을 옮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2~4년) 아버지의 뜻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떠나 율법 주의에 빠진 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다른 복음의 특징을 더 파악해보자.
6절을 보면,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충되는 교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을 지칭한다.
따라서 다른 복음(율법 주의, 믿음+할례)은 행위의 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위 복음은 결국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버리게 만들었다. 곧 갈라디아 성도는 교리와 삶 모두 실패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7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믿는 자를 교란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서 “어떤 자”는 “우리-사도들”과 반대되는 자들로써, 다른 복음을 전한 율법 교사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특징은 “교란시키는 자”였고 “변하게 만드는 자”였다. 성도의 마음을 흔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왜곡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도적으로 뒤틀려는 사탄의 수하들이며, 그들의 교리는 의도적으로 만든 거짓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다른 복음인 율법 주의(믿음+할례=구원)는 성도의 삶을 죄의 늪에 빠지게 만드는 악한 교리였다.
바울은 8절에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함으로 앞에 설명했던 자신의 논지를 더 확고히 한다. 특별히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하여 앞에 말한 내용에 대한 반대 사실을 제시함으로 참복음이 무엇이며 거짓복음이 무엇인지를 입체적으로 부곽시킨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의도는 우리(사도)나 천사는 결코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선포이기도 하다(율법주의가 진리의 복음이라고 결코 주장하지 않을 것).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9절에서 더욱 확고히 한다. 사도나 천사를 넘어서서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 모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주”라는 단어를 8절과 9절에서 두번이나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율법교사와 그들의 교리가 주님께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그분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맺자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믿음으로 구원)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율법의 행위)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을 강하게 책망함으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참복음이며, 그들(거짓 교사)의 교리는 결국 주님의 심판을 초래할 악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주님의 계시로 말미암는 참 복음이었지만, 율법 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은 인간이 만든 거짓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주의 사상은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율법의 멍에를 다시 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는 가운데 거짓 교리로부터 돌아서도록 인도하고 있다. 미혹 당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은혜를 누리도록 초대하고 있다.
다음 문맥인 1장 10~24절에서, 바울은 주님과 복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의 출처를 정확히 밝힘을 통해 앞 구절에서 말해왔던 자신의 논지를 더욱 견고히 한다.
적용
위의 과정을 통해, 다른 복음의 정체와 심각성을 좀더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위의 해석을 근거로 하여 삶에 적용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죄 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진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참 복음은 복음스러워 보이는 율법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며, 다른 복음은 믿는 자의 영적 생활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한 교리이기 때문에 내가 현재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해 깨어있어 분별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조금만 방심하면 나의 마음은 복음의 가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복음을 매일 나 스스로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에게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 결국 기본에 충실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도와 말씀과 교제를 매일의 삶 속에서 신실하게 하지 않으면 성경적 복음은 어느샌가 다른 복음이 되어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를 다짐한다. 또한 복음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복음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더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를 다시 다짐한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아내와 복음을 나누며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실천하기를 결단한다.
결론
지금까지 문맥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적용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러한 방법이 때로는 지식적인 접근으로 느껴져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 해석의 원천이 우리의 지적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조명하심이기 때문에 항상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로 주께 나아가야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복음기도신문]
강민구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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