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주재권 구원 시리즈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 주재권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다르지 않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그 결과로써 행함이 수반되며 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와 상충하지 않는다.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함이 조건으로 요구되지 않으나 참된 구원은 그 결과로서 행함을 반드시 포함한다. 바울은 “오직 은혜”를 강조한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한다(갈 5:1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약 3:17).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 그리고 그 은혜를 얻은 참된 신자는 반드시 그 은혜에 순종으로 반응한다.
- 주재권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칭의와 성화를 이분화하여 양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간과한 기존의 Free Grace 입장이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는 알미니안 신학과 함께 복음주의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재권 구원이 강조하는 행함을 완벽한 성화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 교리에 대부분 동의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
- 구원개념이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 필자는 장두만 박사가 지적한 침례 받는 자에 대한 예시가 존 맥아더 목사의 설명을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 주관적 주재권과 객관적 주재권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주재권 구원이 강조하는 바, ‘열매 없는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반박했다.
- 구원의 확신이 약화된다: 이에 대해 필자는 구원의 확신은 오직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구원 얻는 믿음의 결과로 드러나는 삶의 열매는 신자가 느끼는 구원의 확신을 증진한다고 말했다.
-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주재권 구원은 둘의 구분되는 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 필자는 행위를 가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반대로 육신적인 상태에 머물더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고 진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말했다. 행함을 완벽함으로 오해하지 않는다면 주재권 구원 교리는 오히려 미지근한 상태의 성도에게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것을 독려한다.
-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는 사람의 신앙을 값싼 신앙으로 매도한다: 주재권 구원이 오용될 때 이렇게 변질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며 다만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성화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때 복음의 가치를 값싸게 보고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했다.
마지막 칼럼에서 필자는 ‘오용되는 주재권 구원’에 대해 다루었는데,
1) ’주재권 구원 교리’를 포함한 복음만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오해하는 경우.
2) 구원의 열매로 드러나는 행위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요구하여 겉으로 드러난 특정 행위만을 열매로 인정하는 경우.
3) 주재권 구원 교리에 심취하여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교만한 태도를 갖는 경우.
충분히 변질되고 오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번 칼럼 시리즈를 나누면서 어떤 사람이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모략”의 저자, 복있는사람 출판)를 언급하면서 그가 제시한 복음의 개념에 따르면 존 맥아더의 주재권 구원 교리는 제한적이라고 평을 한 적이 있다.
구체적인 근거를 요구했으나 추가적인 답변이 주어지진 않았고 이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 생기기는 하지만 달라스 윌라드의 기본적인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는 단순히 주재권 구원 교리에 관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재권 구원을 강하게 비판한 찰스 라이리도 동시에 제한적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윌라드가 만인구원주의자(Universalist)가 아닌지 묻는 것을 볼 때 아직 그의 직접적인 설명을 들어봐야 하겠지만, 복음주의에서 지켜내려고 하는 복음의 범주를 벗어난 측면에서 복음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달라스 윌라드의 복음관에 대해서 이 칼럼 시리즈에서 다루지 않는 것으로 하고 마지막으로 주재권 구원이 오용되는 경우를 몇 가지 더 제시한 후에 칼럼 시리즈를 마치려고 한다.
4. 모든 것은 주재권의 문제이다
가끔 주재권 구원 교리를 사랑하는 설교자나 목사가 성도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주재권 문제로 설명하는 경우를 본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성경은 모든 문제를 주재권의 문제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케빈 드영이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구멍난 거룩”에서 잘 설명한 것처럼 거룩함을 이루는 일에 동기 부여가 될 만한 말은 단지 “주재권을 제대로 갖추라”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드영의 책 85-89pp). 몇 가지만 언급하면
물론 각각의 이유가 주재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주재권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의 “주재권” 개념을 갖게 한다. 성경은 모든 것이 주재권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핵심적인 성경의 개념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듣는 우리에게 다양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살도록 권면한다.
용어는 정확하게 설명되고 합당한 문맥에서 사용되지 않으면 혼동을 가져온다. 모든 영적 문제에 대하여, 특히 신자의 거룩한 삶의 문제에 대하여, 주재권 교리를 남용하면 정작 무엇이 주재권 구원 교리가 밝히는 핵심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된다.
5. 주재권 구원 교리를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
성경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먼저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설교자도 신학교에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전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성경은 “남의 눈에 먼지보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마 7:5)고 말하고 예수님은 요한의 미래에 관심을 두는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요 21:22).
다른 사람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또한 성숙한 자들에게 범죄한 성도를 돌아보라고 말한다(갈 6:1).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너희는 능히 서로 권하는 자들”(롬 15:14)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순서다. 우리는 교리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먼저 내가 순종해야 한다. 주재권 구원 교리 역시 마찬가지다. 주재권 구원 교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겸손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성경의 원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다른 성도를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주되심을 왜 인정하지 못하냐고 비난하고 주재권을 인정하지 못한 성도로 손가락질한다면 아무리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는 주재권 구원 교리라도 영혼을 파괴하고 좌절하게 만들 뿐이다.
교리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한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지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지체와 심하게 싸우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이의 실패를 비웃을 수 없다.
주재권 구원 교리를 스스로 적용한다면 그래서 주와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긴 예수를 성실하게 따르기 원한다면 겸손과 온유로 옷을 두르고 불완전하고 덜 성숙한 성도의 발을 씻기기 위해 손을 사용할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고 상처 입히기 위해 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주재권 구원 교리를 제대로 설명할 줄 안다고 해도 교만한 태도나 주장하는 자세로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큼 주재권 구원 교리를 순종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6. 듣지 않는 자세
이것은 단지 주재권 구원 교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듣지 않으려 할 때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SNS와 인터넷 등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가볍고 신속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전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책이나 장문의 글을 읽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며 비판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등의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풍조 때문인지 어떤 교리 하나에 심취한 사람들은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동일한 교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외치기 일쑤다.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의 이야기를 조금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알미니안 역시 칼빈주의의 설명을 들을 때 무엇으로 대응할지 생각하며 듣느라 잘 경청하지 않는다. 서로 자신이 옳다는 것만 보고 다른 사람이 바르게 제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교리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함께 공유해야 할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가르침은 말이나 글로 되는데 의사소통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고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덧붙여야 할 설명이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생각에서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고 풀려야 할 오해가 있다.
주재권 구원 교리가 문제로 지적한 Free Grace 진영은 이 교리를 통해 불명확한 부분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주재권 구원 교리를 강하게 주장한 존 맥아더 목사도 여러 비판과 반응을 통해 “구원이란 무엇인가”(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라는 책을 썼다. 상대 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주장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주재권 구원 교리에 우려를 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룬 형제자매다. 우리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건전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나눠야 한다. 그리스도가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내 형제에게 주재권 구원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우려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내용 중에 혹시 내가 그에게 오해를 하게 만든 부분은 없었는가? 지나치게 강조하여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그가 말하는 것 중 옳은 것은 무엇인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어떤 부분에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가? 어떻게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그런 관점을 갖게 한 배경은 없는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없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양을 맡은 목자는 양을 거짓 교사나 상한 음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때론 강경하게 말하고 무섭게 경고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조심하자. 늑대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양을 공격할 수 있다.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피해는 감수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겠지만, 거짓을 강력하게 책망하면서 동시에 양들에게 교만과 정죄하려는 습관을 먹이지 말라. 주재권은 가르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세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주재권 구원 교리”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해소되기를 기대한다. 주재권 구원 교리가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과 다르지 않고 특히 오직 구원,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사실이 바르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장두만 박사의 비판이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고 문제로 여긴 부분의 위험성에 동의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반론을 제시했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주재권 구원 교리를 남용하는 문제가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바로 잡히기를 기대한다. 부족한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은혜롭고 놀랍다. 무익한 종을 통해 기록한 이 글을 통해 만유의 주인이시며 필자의 영혼의 주인 되신 그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독자를 그분의 진리로 더 가깝게 이끌어 가시기를, 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추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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