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속 문화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겸손과 사려 깊은 태도로 사회 문제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약 중독이 죄라는 것을 믿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약 중독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매춘이 부도덕하다고 믿는 데에서야 다 동의하겠지만, 동시에 성매매에 휘말린 남성과 여성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못하도록 아예 가두는 게 중독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아니면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까?
진실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 다 세상의 어떤 문제에 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기에 그의 특정한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도 동의하라고 요구한다. 당신이 어떤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에 “누구라도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특정 도덕,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도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견해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특정한 도덕에 관해서 의견을 표출하는 순간에 그 자체로 바로 강요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성경에 기초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도덕을 입법화한다고 할 때, 어떤 것을 추구하고 비준해야 할까? 또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십계명이 분명히 금지하는 도둑질을 막기 위한 도덕적 의무를 입법화하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어떤가? 성경은 우상숭배를 죄라고 명시하지만,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중 대부분은 우상숭배를 불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왜 어떤 성경 원칙은 입법화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원칙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이 가진 복잡성이야말로 해답을 찾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정치 소셜 미디어에서 만나는 적지 않은 비판이 왜 일어나는지까지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 문제를 감당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복음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복음의 가치를 알고, 또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도 우리의 태도는 따뜻한 겸손과 소망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 성숙한 시민다운 상호작용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심각한 죄인이며, 그럼에도 무한히 사랑받고 있다고 가르친다. 복음이 알려주는 이런 사실만으로도 교만과 자기혐오를 없앨 수 있다. 복음은 또한 성경을 세상에 적용하는 방법에 있어서까지 우리를 주의 깊고 겸손하며 사려 깊게 만든다.
글로벌 관점
편견과 문화적 맹목, 잘못된 직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외 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별생각 없이 피상적으로 성경을 읽게 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에게만 지극히 상식적인 적용에 빠지기 쉽다. 그런 식의 적용이 단지 자신에게만 말이 되는 이유는 누구나 자신이 사는 사회가 만들어낸 특정한 문화의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하나는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한 바울을 곡해한 것이다. 그 말씀을 읽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제도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런 과거의 실수를 통해서 행여 미래의 그리스도인이 현재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또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지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 놓인 복잡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국가의 정치 상황을 생각해 보라. 독일의 경우 다양한 정치 기반을 가진 여러 정당이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정당도 모든 기독교 가치를 완전히 하나로 통합하지 않는다고 할 때, 독일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까? 중국에는 아예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 그럼 중국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그들에게는 명확한 답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다른 수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도덕 가치를 얼마든지 정치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치 지형에 접근하는 미국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영국에서 일할 때,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므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꺼이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정통적인 이해를 고수하는 스코틀랜드의 많은 장로교인을 만났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 아예 텔레비전도 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에 근거해서, 문화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가장 좋은 길이 최소한 국가의 책임에 관련해서만은 나라가 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미국인처럼 더러운 단어로 생각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와 동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진정한 신자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렇게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1. 정치적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첫째, 모든 문화는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기독교 가치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즉, 믿음을 적용하는 방법에 관해서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건전한 판단과 성경적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와 매우 다르게 사물을 보는 그리스도인이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그들이 가진 다른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들을 기꺼이 잘라내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겸손을 보여야 한다.
명확히 말하자면, 모든 정치 시스템이 다 똑같이 좋다거나 또는 외국의 다른 정치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처럼 잘 작동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똑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녀 삼으신 그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집 밖에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학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동의하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실천하는 방식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의 도덕 규범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도덕이 세속 문화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방법론에 있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정당은 일반적으로 성적 자유가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다. 세속 문화에서 금욕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피임 방법을 제공하는 게 나을까? 일부 그리스도인은 모든 형태의 산아 제한 또는 피임 홍보를 반대한다. 그게 결국은 혼외 성관계로 악용되어 소비주의적인 성행위와 문화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 잘 반영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한편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피임 도구를 쉽게 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성적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차라리 피임 도구를 적극적으로 써서 성병과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혼외 성관계가 제7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데에는 도덕적 합의가 있지만,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는 최선의 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동의하는 도덕적 영역이 있지만, 동시에 정치 정책의 적용에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투표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한다.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을 모두 지지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특정 정당과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절대적 도덕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또한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문화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도덕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도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런 식의 구분은 그 어떤 문화에서도 신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주의 깊게 적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가 성경적 영감에 근거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주장만이 성경의 절대적인 보증을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덕적 명령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그 도덕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해서 건전한 (심지어 열렬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교회에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가? 서로를 향해 배려와 겸손, 호기심으로 충만할 때, 토론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2. 정치적 참여가 우리의 복음전도의 사명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
둘째, 정치적 참여가 전도의 문을 막지 않도록, 우리에게는 복음이 주는 겸손이 필요하다. 복음은 특정한 정치적 의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복음이 하나의 불가피한 정치적 의제를 포함한다고 설교한다면, 교회는 결국 교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된다.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이 특정 정당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더한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특정 정당의 비전을 통해서 세상의 문제로부터 “구원” 받는 것 이상을 포함하는 전인적 사명(holistic enterprise)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죄와 사망, 그리고 심판의 권세를 내리시는 예수님과 동역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류를 대표해서 거룩한 위임을 받은 존재이다. 창세기 3장 속 아담과 하와의 소외로 시작하여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저지르는 아벨 살인, 그리고 결국 창세기 11장 속 모든 민족의 분열로 이어지는 분열의 죄를 일부 해소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사 66:18). 마태가 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마 25:32)라는 말을 들어보라. 이건 사실상 요한계시록 7:9과 같은 의미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하나님 나라가 만물을 회복하는 일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우리가 ‘만국’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의 일부를 감당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른 ‘모든 민족’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했던 설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르스 언덕에서 그리스인에게 설교한 이유이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했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사계절”을 활용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 봄-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박해와 희생적 제자도의 결과로 성장하고 있으며(중국이 여기에 해당) 활력의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 여름-교회는 본질적으로 문화 그 자체이며 나라는 이제 기독교로 인해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대부분의 서구 문명과 현재의 남아메리카).
• 가을-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교회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커진다. 기독교 가치와 정반대로 선한 삶을 사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다. 기독교 국가라는 맥락에서 손쉽게 전도하던 교회가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한다.
• 겨울-교회는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한다. 교회는 이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되고, 여러 면에서 지하로 후퇴해야만 한다(이란, 이라크, 또는 아프리카의 많은 무슬림 통제 국가).
교회에 관한 이 계절 비유는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계절, 역사적 순간,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에 민감해야 한다. 최근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자세에 대해 그리스도인 사이에 흥미로운 내부 논쟁이 있었다. 마이클 그레이엄(Michael Graham)은 동일한 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복음주의자가 문화적 입장에 따라 어떻게 분열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굳건한 신학적 확신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문화에서 그 확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관한 명확한 틀이라는 사실을 그의 글은 잘 보여준다. 뉴욕에 사는 우리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미국 교회에게 계절은 더이상 여름이 아니다. 이미 한참 전에 가을에 들어섰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뉴욕에서 사용한 모델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나머지 지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적 자세
어떻게 해야 할까? 겸손하고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명확하지 않으면 서로 오해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항상 도덕적 신념을 지키도록 부름받았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덕적 신념을 실천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핵가족과 건전한 성을 지지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관여해야 하지만,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반드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결코 정치가 교회를 정의하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신앙이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전도의 힘을 잃을 뿐 아니라, 교회를 책임질 다음 세대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도 원수를 구원하려고 발버둥 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방식을 우리 삶 속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해는커녕 심지어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까지도 반문화적인 태도로 희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혹 거부당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며(마 5:10-11),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벧전 2:11-12) 것이다. 현실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기독교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거부하는 사람조차 내가 거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온유하다고 하셨고(마 11:29),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온유와 두려움”(벧전 3:15)으로 살아야 할지를 상기시킨다. 단지 문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또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친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그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반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빛이 절실히 필요한 문화에 복음의 빛을 가져오기 위해 함께 사역하자. 사려 깊고 은혜롭게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단합하여 이 사회를 함께 변화시키자. [복음기도신문]
마이클 켈러(Michael Keller) | 암스텔담 Vrije Universitiate(PhD)에서 공부하고 2017년 4월 아내 사라와 함께 Redeemer Lincoln Square 교회를 시작하여 보스턴과 뉴욕의 교회들을 12년 넘게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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