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17)
‘삭개오’처럼 변화된 M의 삶
그의 이름은 M이다. 많은 분의 기도 가운데 M이 주님께 돌아왔다. 그러나, M은 비록 그 땅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을 얻었지만,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직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실직당했으며, 가족으로부터의 냉대와 사회로부터 외면을 감수해야 했다. 이슬람권 선교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역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맡긴다.’라는 원칙을 살짝 벗어나 회심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현지인들을 지속해서 돌봐 줄 수밖에 없다. 그들 스스로 꿋꿋하게 서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서 살아가든지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면서 살아가기까지는….
실직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M을 위해 우리는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마련해 주었고 매달 월급을 지급했다. 그러던 중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M의 어머니가 매우 격앙된 어조로 전화를 주었다.
“우리 아들 데려다 예수 믿게 하고, 인생을 망쳐놓고 직장도 잃게 하더니, 어떻게 한 푼의 월급도 안 주고 일 년이나 부려 먹을 수 있나요?”라며 화가 몹시 나 있었다. 우리는 당장 M을 불렀고, 그동안 매월 지급했던 월급을 어머니께 왜 한 푼도 안 갖다 드렸냐고 물었다. 그때, M이 들려준 사연이다.
“사실 우리 동네에 팔순이 넘은 무슬림 노인이 살고 계시는데, 이 노인이 너무 가난해서 병이 나도 약 살 돈이 없고, 아파도 병원에조차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불쌍하다는 생각에 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일 년 동안 제 필요한 용돈만 빼고 월급 전부를 그분께 드리느라고 어머니께 갖다 드릴 수가 없었어요.”
사정도 모르고 M을 혼내려 했던 우리 생각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이 노인이 가족의 부축을 받아 우리 가정 교회를 찾아와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이라면
“나는 팔십 평생을 단 한 번도 알라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그분의 명령대로 살아온 사람이라네. 그런데, 오늘 저 M이 내게 그동안 보여준 그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이라면 나는 오늘부터 기독교인이 되어 살고 싶다네.”
진지하고도 확고한 노인의 표정에서 확신이 선 우리는 곧바로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하였고, 그 노인은 전혀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다. 노인은 이미 준비된 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진짜 놀랄만한 일은 다음 주일에 일어났다. 노인이 자기 가족을 데리고 우리 가정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예수를 영접한 후 노인은 곧바로 집으로 가서 온 가족을 불러 놓고 M의 얘기를 시작으로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체 가족에게 다음 주에 자기와 함께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자고 말했다고 한다. 가부장적 풍습이 강한 현지에서 제일 어른이었던 이 노인의 말은 당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주일 우리 가정 교회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건 우리 가정 교회 형제들의 수보다도 많은 노인의 가족이 방문한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 갓 믿은 우리 형제 모두가 동원되어 예수 믿겠다고 찾아온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 손을 얹고 영접 기도를 도왔다. 노인의 가정 전체가 구원받는 순간이었다(행 16:31).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내 편견
이 일은 20여 년의 일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때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무슬림 선교에 대한 그때까지의 내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슬람의 벽은 두껍다.”, “무슬림 전도는 난공불락이다.”, “이슬람권 선교는 문이 꽉 닫혔다.”, “수년이 흘러도 무슬림 회심자 한두 명이 나오면 성공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정말 두꺼웠던 것은 이슬람의 벽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기를 거부했던 내 마음의 벽이었다. 정말 난공불락은 저들이 아니라 오해와 편견으로 일관된 내 자신이었다. 굳게 닫힌 것은 이슬람의 문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열려고도 하지 않았던 내 무관심의 문이었다.
당시, M이 그 노인에게 보여준 사랑이 지금까지 이슬람권 선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그런 위대한 사랑이었나? 결코 아니다. 그저 M은 이 노인을 불쌍히 여겼고, 그래서, 자기 월급을 이 노인에게 나눈 것이 고작 전부였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작디작은 M의 실천적 사랑이 수년이 지나도 한 명의 개종자가 나오기 어렵다고 말들 해오던 이슬람권에서 한 가정이 송두리째 구원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그분의 말씀과 삶이 합쳐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합쳐져 있다. 그 합쳐짐이 자기 삶 속에서 조명되는 그 어느 그리스도인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마지막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 함께 어우러질 때 복음이 세상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한 그 누구라도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을 보이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따르지 않은 반쪽뿐인 복음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실 일은 매우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할 일
이제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의 할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생명의 말씀을 삶을 통해 밝혀서 우리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로 자랑할 것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빌 2:16).
우리는 이제 모든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최우선순위를 두며 살아가야 한다. 아직도 지구촌 30억의 인류가 구세주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날마다 삶의 추진력을 얻으며, 우리 생에서의 정열과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하는 것이 돼야 한다. 어떠한 사역도 우리에게 작거나 하찮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구세주시며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완전한 죽음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에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땅에서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자들이다. 약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다운 거룩함이 있다고 믿는 자이다. 또한, 우리 자신도 각자에게 허락된 삶의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함을 끼치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누군가가 얘기했듯이 사역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일은 어쩌면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보다 작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방울이 없다면 바다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 전,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현, 터키어권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M-NET KOREA)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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