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엄마 품에서 하늘만 보이듯, 주님 품 안에서 아버지만…

사진: crosswalk.com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징계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멸하신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전이 됩니다. “나는 성전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봐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과 간구와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일은, 단순한 고백이나 종교적 행위나 열심을 내는 의지와 갈급함으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알지 못하느냐!’ 하신 까닭은,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안다’는 단어를 헬라어 원어로 보면 ‘에이도’입니다. 지식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작동해야 지식이 됩니다. 어떤 상황이 되기까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고, 생각이 지적인 것으로 습득된 것이 ‘에이도’입니다.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느냐, 하신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나 다짐의 차원이 아니라, 관계적으로도 알 수 있고 지적으로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되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실 때만 성전이 됩니다. 어떤 간절함도 중요하지만, 먼저 어떤 마음의 상태에 성령께서 오실 수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떨림과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확신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확신함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구원을 맛보는 날까지 주님과 함께 경건 생활을 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떨림과 두려움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소원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소원인지, 나로부터 비롯된 소원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라 나의 소원일 것입니다.

목사라고 목사의 소원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소원은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다면 성도는 더할 것입니다. 습득된 영적인 경험과 어떤 믿음의 분위기로 내 안에 있는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주신 소원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단 하나의 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정말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막 11:11)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성전이라면,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입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곳은 많습니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남성의 뜰을 지나면 번제단이 있고 성소가 있고 마지막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그냥 건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려는 예수님께는 어린 나귀가 필요했습니다. 한 번도 등에 짐을 실은 적이 없는 나귀여야 했습니다.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여야 했습니다. 이 조건이 갖춰져야 주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 삶에도 짐이 있으면 주님께서 타실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짐이 있으면 주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용을 써봐도 실제 우리가 성전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약과 구약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합니다. ‘너의 염려를 맡겨라! 너의 경영을 맡겨라! 너의 미래를 맡겨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우리에게 염려가 있으면 주님께서는 오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짐을 지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오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길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부정하지 않고, 문제를 부정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부정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문제만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짐을 지고 있는 한,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언어와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도 성전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근본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두려움과 떨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길이 다른 것입니다.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과 표정과 언어가 다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충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마음에 짐이 있을 때 주님을 부르짖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결론 내려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리의 짐과 우리의 염려가 있는 한 안 되는 것입니다. 짐과 염려를 버릴 때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무도 타보지 못한 나귀, 어떤 짐도 실어보지 못한 나귀를 타고 주님께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있는 무거운 짐을 버리기 위해, 골방에서의 시간은 중요합니다.

선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우리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은 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 종교적인 구호로 그치면 안 됩니다. 짐을 해결하기 위해 사는 것이 책임감 있는 태도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짐을 지고 해결해야 주님의 사람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만 속고 살아야 합니다. 짐에 눌려 있는 성도들이 보입니다. 짐을 내려놓는다고 해도 바로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짐을 내려놓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또 나귀의 등에 겉옷을 올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때 나귀에 타십니다. 겉옷은 신분을 의미합니다.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우리 신분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신분을 벗으라고 하면 두려웠습니다. 목사 직분 벗으라고 하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들으면 해방감과 자유가 밀려옵니다. 우리는 신분에 걸맞은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쓰고 책임도 지려고 합니다. 신분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상위그룹으로 올라가려고 하고, 자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신분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 자아실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아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분을 내던지면 자유가 옵니다. 아버지의 신분, 남편의 신분, 목사의 신분을 버리면 자유가 옵니다. 그 신분이 있는 한 우리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신분을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신분은 오히려 깔고 앉아야 합니다. 신분 상승 욕구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성전은 되지 못합니다. 성전이 아니면 주님께서는 멸하십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열심을 부려도 성전은 안 됩니다. 먼저 신분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여호와는 빛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나의 빛이면 우리는 헤맬 수 없습니다. 분별도 되고 속일 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빛이면 하나님만 보입니다. 주님만 보이니 주님이 기준 되어서 분별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빛이면 주님만 보여야 하는데 우리는 근심, 종교적 열심, 여러 속사정, 공허한 마음도 보게 됩니다. 다른 것이 참 많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짐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주님이 빛입니까? 사실, 자녀들이 빛입니다. 교회의 강력한 우상은 가정입니다. 가정 중에서도 자녀가 강력한 우상입니다. 자녀를 위해 한 것이 정말 자녀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정직하게 보셔야 합니다. 그것만 정직하게 볼 수 있어도 많은 것이 풀립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녀가 빛입니다. 자녀의 영광을 내가 취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되고 싶다는 욕구가 완전하게 죽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려면 우리 겉옷을 벗어 나귀에 얹어야 합니다. 우리 신분인 그 겉옷 위에 주님께서 앉으십니다. 그때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의 직장, 건강, 돈, 가정,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먼저 앉으셔야 합니다. 교회 교역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순전이(교회 리더십)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데, 맥락은 같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우리에게 주님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정말 괴롭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1~15)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조건으로 사역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흘러가야 합니다. 빛 되신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짐과 신분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라 하셨습니다.(시 27:8) 이 말씀으로 제 목회의 무거운 짐 하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전에 학위도 2, 3년 안에 따고, 스트레스 없는 얼굴로 목회도 하는 동료들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노력해야 하는 유형이었기에 에너지도 더 썼고 건강도 더 상했습니다. 노력해도 잘 안 됐습니다. “하나님, 왜 저는 이렇게 노력해야 합니까?”

종교적인 것으로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성경 많이 보고, 기도도 많이 하고, 수천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라!’ 분별은 주님으로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하니 주님으로 분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갑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옳고 그름이 분별됩니다.

‘우물 안 스쿨’ 학부형들이 아이들을 볼 때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것을 보면 경외롭기도 합니다. 아이 엄마의 얼굴을 보면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얼굴을 보면, 주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보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언어와 행동, 낯꽃을 통해 공감하기도 하고 교정했습니다. 분별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확증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스스로 나를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께서 저를 바라보고 좋아하시는 것 같을 때 저도 괜찮습니다. 돈 그리스도, 자녀 그리스도, 건강 그리스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자입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이 땅의 신분과 짐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5~17)

유명한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나에게 오시면 반드시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실제 알지 못하기에 성전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주님은 더러워진 것을 치워가십니다. 우리 속을 정돈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속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밀쳐내지 말기를 축복합니다. 염려가 아니라 고대하고 기대하는 열망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청결한 마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마태복음 5장) 청결은 영어로 ‘pure’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0년 동안 음란의 문제로 헤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며 음란의 죄를 떨쳐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안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는 말씀을 만납니다. ‘아!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구나!’ 그때 음란의 문제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실제로 임했을 때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깨끗해집니다.

왜 주님 이야기를 하는데 속이 거북하고, 종교적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마음에 평화가 없을까요? 주님 앞에서 청결(pure)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결은 실제로 우리 삶에서 청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청결한 인생 되어, 주님 보기 원합니다’ 하는 고백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 12:6)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징계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축복하기도 하지만 내일을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당신의 능력과 사랑과 엄위함을 드러내시려고 힘써 경건을 훈련하고 경건하게 생활하라고 하시며 내일을 축복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내일을 징계하시기도 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미 생명책에서 지워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징계받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밀어내려고 그렇게 애쓸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를 최고의 선으로 이끌어가십니다. 성전된 사람에게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단 한 가지만 구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 계심이 선명하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신나거나 어렵거나 상관없습니다. 주님으로 내 안이 든든해짐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만!’이라는 말을 제가 자주 씁니다. ‘만’을 붙여서 쓰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만’ 보기 원한다는 말은 다른 어떤 상황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밀어내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변호하거나 짜증스러움을 표출하기 위해, 감춰진 속을 이중언어로 표현하려고 ‘주님만’이라는 말을 쓰면 곤란합니다. 주님이시면 실제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속이 들키기를 축복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믿음의 사람이 많이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이 말씀의 어느 부분에 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하면 패가망신합니다. 간음하고 도둑질하다가 들키면 큰일납니다. 큰일나니까 지킵니다. 걸리면 곤란해지고 망하게 되니까 지킵니다.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주님 때문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1, 2, 3계명이 그래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6, 7, 8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간음할 수 없고 도둑질할 수 없고 살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만’ 사랑한다고 말하셔야 합니다. “주님만 보여야 하는데 마음에 자꾸 다른 게 들어와요, 주님! 주님만 보이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소원하셔야 합니다.

‘주님만 계시면 되지’ 하면서 어떤 사건과 상황을 변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는 말씀만 크게 보이는 나를 내던지고 ‘주님을 사랑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의 성전이 되기를 소원하는’ 그리스도의 몸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신분을 내던지고, 짐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청결함으로 우리가 성전 되어 가는 것을 경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기도할 때도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돈에 미치면 돈 때문에 기도합니다. 자녀에 미치면 자녀 때문에, 사업에 미치면 사업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이 실존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 공허한 종교생활을 빨리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아, 내가 짐을 갖고 주님 앞에 나왔구나, 내 안에 주님이 안 계신 것이었구나, 지독하게도 신분 상승을 위해 살고 있구나, 신분 상승도 못하면서 그 욕구는 지긋지긋하게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구나, 주님과 나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정말 많구나!”
진실로 내가 성전인가! 이것이 보이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마음에 다가와 그분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일곱 살 여자아이가 있는데 별명이 ‘박 권사’입니다.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이렇게 말했답니다.

“와 여기가 우물 안이네.”
“왜?”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하늘만 보이잖아.”

하늘만 보이려면 주님 품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에 감동만 받지 말고, 아이랑 나누며 시로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엄마 품안에 있으니 하늘만 보이네. 주님 품 안에 있으니 아버지만 보이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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