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 목적과 가치를 모른 채, 고통만 당하셨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고난이 또 있을까 싶다. 죄를 모르시는 분이 우리 죄를 담당하셔서 모든 고통과 수치, 절망과 저주를 받으셔야 했으니 말이다. 성경에는 예수님보다 앞서, 억울한 고난을 겪은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욥이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수소와 숫양을 그에게 가지고 가라 하시며, 욥이 친구를 위해 번제와 기도를 드리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예수님과 욥이 오버랩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 앞에서 욥은 어떠했을까.
렘브란트와 라이벌이었던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얀 리벤스(Jan Lievens)는 욥을 그리면서 그의 무력함을 강조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욥의 육체는 그의 의로움을 표현한다. 팔과 다리를 늘어뜨린 욥은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왼쪽에는 욥의 아내가 깃털 장식의 모자와 금목걸이를 보여주며,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치고 있다. 모자와 목걸이는 지나간 부귀영화를 가리킨다. 오른쪽에는 불을 뿜어내는 두 사탄이 있다. 욥에게는 수치와 조롱, 절망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런 암담한 고난 속에서는 누구의 위로나 조언, 원인 분석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되려 아픔만 더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같으면 그런 신은 안 믿을래.”, “하나님께서 네 죄를 다루시나 보다.” 등, 섣부른 한마디 조언 그 자체가 고난일 수 있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은 고난 속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 고난이 내게 주는 의미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기에, 반드시 주께 답을 구하여야 한다. 죄의 다루심인지, 아니면 묵묵히 지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지를 분별할 지혜가 필요하다. 만약 후자라면, 현재 고난의 가치, 즉 고난이 우리의 영적 성숙과 정결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고난이 훈련임을 알 때, 놀라운 새 힘이 생긴다. 욥의 늘어진 사지가 들리면 십자가 형태가 되듯, 고난이 훈련으로 바뀌면, 처절한 자기 부인을 견딜 힘 또한 주신다. [복음기도신문]
이상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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