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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핑계를 멈추고

▲ 사진: Nicolas Peyrol on unsplash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17~25)

우리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소원도 있습니다. 의지를 발휘해 담으려는 것도 있습니다. 대부분 십자가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는 핑계거리가 됩니다.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와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핑계를 댑니다. 사실, 핑계거리가 사라지면 시원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은 이 땅에서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이 땅의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고 싶고, 갖고 싶고, 되고 싶은 것’에 대해 시험을 받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의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의가 나타나게 되는 계기는 복음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상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없었는데 복음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생겨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만 하나님 마음에 듭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마음에 들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 복음인 예수 십자가! 십자가에서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이 드러났다는 말씀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2)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신 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이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복음인 이유는 유월절 어린 양 말씀을 보면 선명해집니다.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면 죄와 저주와 죽음이 넘어갑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피를 바른 문설주 안, 곧 집안에서는 잡은 양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 양은 예수님입니다. 문설주의 피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잡은 양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의’가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고,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포하십니다. 세례는 헬라어로 ‘밥티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고 물에서 다시 올라왔을 때 하늘이 갈라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곳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 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은 곧 출발점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믿음입니다. 어린 믿음, 연약한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믿음이 아니라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아가 죽은 곳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돈, 사회적 위치, 성공이 구원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산 믿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8)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에 의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의분은 의의 일부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의분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안목과 시선은 두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과 인본주의 세계관 이야기와 같습니다. 우리의 식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나빠, 자본주의가 좋아, 통제하는 사회는 안 좋아, 시장경제가 좋지, 민주주의가 좋지, 전체주의는 나쁜 거야.’ 인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은 선하기 때문에 인간이 소망이고, 인간이 이상적인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인본주의 안에서 옳다 그르다를 가르치고 속이려는 사탄의 속임수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전체주의는 모두 인본주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세계관은 불의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의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진노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많고 괜찮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십자가 밖에는 애국자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방주 밖에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십자가 바깥에도 선한 사람 많습니다.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경제인, 예술인도 많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밖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야!’ 하고 반발하는 분들이 교회에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출석하시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이미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히 알려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으로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전도사로 부름받아 첫해는 중고등부, 이듬해는 아동부를 맡았습니다. 주일에 설교할 때 아이들에게 볼펜 하나를 들고 물었습니다. “이 볼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답했습니다. “쓰는 거죠.” 제가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여기서 목적이 없는 물건이 있나요? 모든 물건은 목적이 있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쓰레기는 목적이 없잖아요”. 순간 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래서 쓰레기인 거지. 목적이 없으면 쓰레기가 되는 거야.”

교회 부근에 황룡산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주 가는 것 같습니다. 땅은 개인 소유가 아니면 보통 나라에서 가져갑니다. 지금은 땅뿐만 아니라 바다도 하늘도 소유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산을 보면서도 초월적인 존재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것에 숫자를 매깁니다. 숫자가 세상을 이끌어갑니다. 숫자를 더 차지하기 위해 경제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어느 숫자 이상은 채우지 못합니다. 토지 등기부 등본이 생긴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땅과 하늘이 그렇게 소유가 명확해지고 분명해졌습니까? 사탄의 술수입니다. 숫자놀음입니다. 땅을 실제로 보면 얼마나 신비합니까? 미생물과 영양분이 결합하고 활동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연히 시간과 결합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초월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진노의 날에는 핑계치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교회 오는 길에 피어 있는 배꽃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배밭 주인을 찾아가 차를 한잔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등기부 등본에 의한 것 말고 실제 배밭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보면 부모를 닮았습니다. 자녀가 부모 닮아서 태어나는 것은 부모의 의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DNA는 하나님 것입니다. 아침마다 자녀를 보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얼굴도 너무 깎고, 바르고, 다듬고, 조이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땅이든 하늘이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온 우주 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순리를 역리로 쓰는 대표적인 예, 동성애를 말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을 보고도 핑계를 대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유는 마음이 이미 더럽기 때문이고 이미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면, 마음이 이미 더러워지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마음에서 복음을 밀어내고 돈을 채우고 세상을 채우려고 하는 이유는 마음이 이미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토브원형학교 학생으로부터 또 시가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핑계’입니다.

어! 내가 일하느라 성경을 읽지 못했네.
어! 내가 쉬느라 기도를 못 했네!
어! 내가 TV 보느라 숙제를 못했네.
아니다.
내가 못한 게 아니고 내가 주님의 음성을 안 들은 거다.

초등학교 6학년이 안 듣는 것과 못 듣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구가 크기 때문에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안 듣습니다. 안 봅니다. 그리고 숫자놀음에 빠져서, 채우고 싶고, 갖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마음에 채우며 삽니다. 그래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고 싶고, 천하만국을 보며 갖고 싶어하기도 하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게 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죄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는 알지만 자신의 죄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죄의 무게는 잘 압니다. 다윗도 조건이 갖춰지니 넘어집니다. 살인죄, 간음죄, 도둑질을 저지르고 거짓말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솔로몬을 낳기 전에 낳은 아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 동안 그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해 알았습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묵상했던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첫 아이가 죽을 때까지 죄의 무게도 느끼지 못하고 돌이키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다 못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양이 아주 많은 부자가 가난한 집에 있는 유일한 양 한 마리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다윗에게 묻습니다. 다윗은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분노합니다. 그 이야기의 장본인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저주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는 죄에 대해 통증을 느끼고, 죄의 짐을 무겁게 느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이 힘들고 어려워서 아팠는데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죄에 통증을 느낄 수 있고 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결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돌이키고 자복합니다. 그런데 굳은 결심이 주변을 힘들게도 합니다. 자기는 은혜를 받았고, 그래서 세상을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죽으면 죽었지,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펄펄 뛰며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배반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잘 믿을 것이라는 결심이 주님의 음성을 그대로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님 말씀이 그대로 들렸다면, ‘주님, 제가 배반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제가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한 걸음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되는 공적인 말씀을 그대로 듣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큐티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공동체에 허락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 가운데 말씀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그 말씀은 반드시 공동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교회에 이런 분이 계셨습니다. “아니, 설교말씀만 말씀이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 말씀인가요?” 다른 책을 보거나 다른 말씀을 듣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들려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듣는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핸드백이 여기 있다면 주인도 있습니다. 주인을 못 찾았다고 해도 주인은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핸드백을 가져가려고 합니다. 주인을 찾지 못했을 뿐인데 가방을 가져갑니다. 그것이 숫자 놀음입니다.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만물이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육과 숫자가 이끌어가는 세상에서 나를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이라는 인본주의 가치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에필로그

사회운동을 하는 것처럼 인본주의 교육과 전면적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만큼은 할 것입니다. 도시를 보고 자연을 보며 ‘에이, 하나님 것인데 그걸 자기 것이라고 하네’ 하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사회 시스템과 경제 구조를 보며 ‘에이, 다 하나님 것인데 욕심을 부리네’ 하는 중보와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으로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진노의 날에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로 교회는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절제하셔야 합니다. 말일에 주님 오시는데 시집·장가가고 세간살이 가지러 간다는 말씀이 실감나는 때입니다. 영적인 상황이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다시 서서, 너무 자신만만하지 말고, 죄의 통증을 달라고, 죄짐의 무게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죄의 통증을 느끼고 주님 앞에 나아가 탄원하며,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 살고 싶다고 기도하며,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함을 마음 중심으로 소원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핑계를 멈추고! 복음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예수 안으로,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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