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말씀이 있다

사진: Aaron Burden on unsplash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2~17)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은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기초로 ‘하늘에 뿌리를 두고’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봤다면 이제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내기’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볼 것입니다.

거뜬하다는 것은 손쉽고, 가볍고, 상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으로 거뜬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뜬하게 살아내지 못한다면, 먼저는 세계관의 문제요 두 번째로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두 가지 세계관이 등장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말씀으로 세상을 보고, 말씀이 힘이요 능력이기에, 말씀을 따라갑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열리면 주님 말씀 따라가지 못하는 삶에 대해 몸부림치게 됩니다. 토브원형학교와 우리 교회의 최종 목표는 순종의 전문가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 인본주의적 세계관도 나타납니다. 사람이 소망이고 사람이 능력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사고가 곧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한껏 끌어올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면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그렇게 됐습니다. 인본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없이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이 소망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힘든 이유는 인간이 희망이라는 개념으로 설계된 교육이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이 사회를 이끌어 갑니다. 사회가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사회를 좌지우지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교육받고 은퇴하고도 평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받습니다. 예전에 MBA(경영학석사)는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류 학문이 되었습니다. 몇십 년 안 됐습니다. 회사에서 관리자가 되고 엘리트가 되고 주류세력이 되려면 경영학 석사를 해야 합니다. 또 예전에는 대학 졸업장이 특별했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것이 됐습니다. 졸업장을 받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입니다. 졸업장을 받아야 어떤 그룹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 산다고 여깁니다.

인간이 주체요 인간이 희망이라는 인본주의 공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공교육을 평생 받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안 되고 환경도 안 되고 당연히 순종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 없는 구조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자아는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자아실현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기에 자아가 죽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말만 들어도 어렵게 된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거뜬히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구원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돈’, 그리스도 ‘자녀’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은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품고 삽니다. 인본주의 공교육의 폐해입니다. 박해받을 때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셔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있고,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박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박해는 몸의 핍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도 박해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부부가 서로 박해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 남편이 핍박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핍박한다고 하면서도 생활비는 주고, 몸에 상처를 입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핍박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박해입니다. 바울의 편지 내용을 지금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야, 내가 한때 잘 나갔잖아. 가말리엘 학파에, 베냐민 지파에, 로마제국 시민권도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예수님 만나니까 내 가치가 바뀌었고 내 속사람이 바뀌었어. 그래서 그분 뜻을 따라서 살려고 했지. 그런데 주님의 뜻을 따라가려니까 정말 많은 박해가 있었어.” 바울의 마음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상황이 바울에게는 박해였습니다. 우리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안전하기만 합니까, 아니면 박해가 있습니까? 박해가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3)

악한 자는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악한 자가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 밖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도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박해의 때에는 악한 사람이 더욱 악해진다고 합니다. 그럼 ‘악’의 기준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토브’는 ‘선’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됩니다. 착한 성품을 가졌다는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가깝지 않으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 하나님께서 부으시고 채우시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악한 것은,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주님과 가까워진 사람은 마음이 악해질 때 먼저 긴장하고 갈등합니다. ‘이럴 때 딱 한 번 눈감으면 되는데. 이것을 그냥 갖고 싶은데, 그럼 주님과 멀어지잖아!’ 그러나 악하면 갈등하지 않고 주님과 멀어지는 쪽으로 선택합니다. 특히 핍박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말로는 믿음 이야기하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입니다.

회사 다니면 승진해야 하니까 인사권자나 오너십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회사에 온 마음을 다 씁니다. 그럼 그때가 박해 상황입니다.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박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님 따라가려고 하는데 마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상황이 박해입니다. 인본주의 시대 자체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박해입니다.

제가 좋은 목사가 되려고 성도들의 마음을 살핀다면 박해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을 보통 선하다고 말하지만 제가 성도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박해입니다.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것도 박해입니다.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에 찌들어 있다면 전혀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가 가정에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되려고 하는 마음을 멈춥니다. 제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 마음이 주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을 멈춥니다. 주님께 마음을 드립니다. 주님!”

코로나19가 우리를 총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원해지는 구석도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생기니까 공장이 멈추고, 군대가 멈추고, 전쟁도 멈추고, 자연환경은 오히려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전 인류가 하나의 문제로 동일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바이러스 하나가 인본주의 세계관이 낳은 수많은 이념들을 멈추게 하고 온 인류를 안절부절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치료제와 백신이 빨리 나와서 코로나19가 잠잠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외하지 않았군요. 피조물이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군요.” 하고, 회개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먼저 돌이켜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던 것을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루시퍼의 말처럼, 인간이 아름답고 복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인간이 건설한 사회가 아름답고 복될 것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빨리 돌이키고 주님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마음 돌이켜 다시 주님께 달려오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4~15)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배우고 확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말씀에 능통했기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유일한 구원자’ 예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진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다시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을 돌이켜 하나님께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다른 것을 채웠던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마음에 채우는 지혜가 풍성하게 담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자녀에게, 직장에, 돈에 마음 빼앗긴 것을 다시 되찾아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지혜가 성경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은 곧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하나님의 호흡을 들이마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오면 내 속에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목사도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돌이키게 되고, 그때 받은 주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도 흘러갑니다. 관록이나 공부 많이 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 내 안에 채워졌을 때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깃들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관에 관한 설교말씀이 선포된 뒤 교회에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는 학부모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물 안 스쿨’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올해 7살 된 박시온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기도하는 모습이 참 예쁩니다. 영적으로 무엇이 그 아이를 감싸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아이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시온이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부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못 살았는데 저 아이는 저희들과 다른 것 같아서 좋습니다.” 제가 단호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렇게 예쁜 아이도 조건만 갖춰지면 언제든 타락할 수 있는 죄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적 세계관 교육은 불가능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성경적 세계관은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존재론적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성경적 세계관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함 받은 죄인이라는 의식이 사라지면 우리는 죽습니다. “주님! 저는 어떻게 해요, 마음이 여기서 헤매고 있는데, 마음을 이렇게 빼앗기는데 어떻게 해요? 주님!” 존재론적인 죄인일 때만 이렇게 주님을 찾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고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는데 주저함이 없이 나아가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은 복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둥글둥글함은 기독교 세계관을 너무 고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적 유일신은 너무 독선적이니 그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꿈꿀 수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둥글둥글한 것이라면 우리는 둥글둥글하게 살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웃으면서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의미로 둥글둥글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주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며 주님 따라갑니다.”

그때 이 세상을 거뜬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볍고 손쉽고 상쾌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소풍처럼 행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생이 소풍되려면 하늘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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