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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한 편의 시가 일깨우는 경이로움

사진: pixabay

 시적 화법이 산문보다 진실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때가 많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시를 수업에 소개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를 늘 진행하였다. 먼저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시를 이해하고 즐기라고 하신 의도를 여러분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항상 그렇듯이 학생들은 화성인이라도 만난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좀 더 강력한 어조로 반복해서 질문한다.

누군가가 제일 먼저 정답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함을 느낀다. 정답은 성경의 약 1/3이 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시에 관해 생각해 보는 여유를 조금 갖는다면 삶이 좀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설득하려는 것이 나의 취지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 그렇게 하는 그들의 습관을 지속하는 격려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의 세계 

비록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시는 이미 우리 삶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시와 함께 찬송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찬송과 노래는 시의 한 형태로, 내가 문학 수업에서 가르치는 시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시의 상당 부분이 비교적 복잡하고 어렵지만 찬송과 노래의 시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시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평범한 하루 일과 동안 기본적으로 시를 활용하고 있다. 일출을 보며, 또는 획기적 사건을 이야기하거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나 우리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등의 경우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모두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시적 언어에 의지하는가? 왜냐하면 시적 화법이 산문보다 진실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오해

살면서 시를 쓸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가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시를 다루는 법을 알았겠지만,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설교자들이 성경의 시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단언하는 성도들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시에 관한 내용은 건들지 말라는 압력을 받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시를 접하는 데에 관해 시대적인 요소는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와 비교해 교육을 덜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더구나 시는 압축되어 있으며 이미지(구체적인 대상과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한다. 그것의 간략한 소통 단위에 대한 선호와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의존보다 오늘날 더 특징적인 것은 무엇일까?

또 다른 오해는 시가 일상생활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첫째, 시의 실제 언어는 삶의 일상 경험 가까이에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시인들은 우리를 물과 양(羊)과 빛과 좁은 길의 세계에 뿌리내리게 한다. 둘째, 시의 주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다. 소설은 인간 삶의 세계로 가는 창이고, 시 또한 그렇다. 시에 관한 어떤 책의 제목―시와 평범한 삶(Poetry and the Common Life)―만 보더라도, 거기에 시적 언어와 시적 내용의 본질을 모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를 읽는 데 유익한 도움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시와 가까워지게 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라는 제목 아래, 시를 접하기 위한 격려의 글을 정리하였다.

첫째, 시를 진심으로 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시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가 담론의 독특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체와는 다르다. 우리가 이것을 장점으로 볼지 단점으로 볼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적용하는가에 달려있고, 나의 목표는 일반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를 포용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시가 우리의 일상 표현 방법과 다르다고 비판한다면 우리는 시를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성경은 시를 새로운 노래(시 33:3, 40:3, 96:1)로 표현하고 있다. 시의 참신함은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반가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시인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그 언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시의 기본 단위는 이미지(그러나 오직 이것만이 시의 요소는 아니다)이며, 구체적인 대상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를 의미한다. 집과 산이라는 단어는 이미지이고, ‘걷다’나 ‘숨다’라는 단어도 이미지이다.

때때로 이 이미지들은 직설적이고 문자로 표현되는 그대로이다. 예를 들어 자연 시인은 전형적으로 물리적인 그림을 우리의 상상 속에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편 104:16의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라는 구절은 직설적 표현이다. 나무는 문자 그대로의 나무이고, 물은 문자 그대로의 물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해와 방패”(시 84:11)로 선포할 때처럼 시적 이미지는 비교나 비유의 일부일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의 해와 방패는 아니시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하나님은 해와 방패 같다고 역설한다.

언어적 에너지 드링크

이미지의 시적 언어와 말의 형태가 갖는 이득은 무엇일까? 시적 언어는 평범하고 지나치게 친숙한 것이 유발하는 단조로움과 진부함을 극복하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대화로 끌어들인다.

은유나 직유 형태의 비교는 어떤 것이 비교되는 다른 것과 어떻게 유사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관심을 촉구한다. 시는 수수께끼와 비슷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5)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는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이런 식의 이해를 위해서는 속독이 아니라 천천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즐겁게 시를 감상하기 위한, 내가 줄 수 있는 중요한 조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시적 이미지와 비유의 의미를 풀어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발적 의사만 있다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논의하는 시의 형태는 짧은 시를 뜻하는 서정시이다. 서정시는 명상적이거나 성찰적인 경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거나 감정적인 경향도 있다. 성찰적 시를 통해 시인은 발표된 주제에 대한 사고 과정을 독자와 공유한다. 감성적 시에서 우리는 시의 중심 주제에 대한 시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시편 1편은 경건한 사람에게 오는 복에 대한 묵상으로서 악인의 비참함과 대조된다. 찬양 시는 경건한 감정의 표현이다.

서정시의 짧은 내용은 내가 설명한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읽기 방식을 전적으로 가능케 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 시는 긴 설명의 산문보다 한 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시를 언어적 에너지 드링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를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 10분에서 15분 정도 시간을 할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에세이나 책의 한 챕터를 읽는 데 통상 걸리는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이다.

마음을 깨우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의 형식이나 기법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시의 내용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시는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신앙공동체의 공유된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시의 목적이다. 서정시는 생각, 감정, 경험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이것들을 응시하게 한다. 시는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게다가 존 밀턴에 따르면 시의 목적은 “올바른 곡조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애정은 우리의 감정이라는 단어와 겹치는 오래된 단어이다. 시는 적절한 감정을 깨우치는 정서적 형태의 글쓰기일 때가 많다. 내가 권하는 시는 우리가 경험의 한 측면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에 대한 올바른 길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 대해 올바른 느낌이 들도록 도울 수 있다.

반세기 동안 문학을 가르친 모든 활동 중에서 나에게 가장 즐거움을 주는 것은 짧은 시를 감상하며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Explication(자세한 설명)이란 단어는 자세히 읽거나 본문을 보는 것을 가리키는 문학 용어이다. 나는 당신의 애정을 일깨우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하고, 바라건대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시를 읽어 볼 것을 권면한다. [복음기도신문]

 시적 언어는 평범하고 지나치게 친숙한 것이 유발하는 단조로움과 진부함을 극복하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대화로 끌어들인다 

Leland Ryken | 리랜드 라이큰은 지난 51년 동안 Wheaton College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섬기고 있다. ‘The Soul in Paraphrase’를 비롯하여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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