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교열전 (19) – 제주 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2018년,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3주년을 맞았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한지 꼭 111년이 되는 해다. 한국은 복음을 받은 지 22년 만에 첫 선교사를 파송했다. 조선의 선교사가 처음으로 파송된 곳은 제주 지역이다. 당시 언어는 물론 문화 등 생활환경이 판이했던 제주는 선교 지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주선교의 밑그림을 그리시다!
제주 땅에서 개신교가 들어오기전 천주교의 흔적은 18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1901년 천주교인과 지역주민 사이에 충돌은 이 땅에 큰 아픔을 남겨주었다. 천주교측은 ‘신축교난’이라고 하는 ‘이재수의 난’은 수백명의 천주교인과 제주도민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으로 소설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로 또 ‘이재수의 난’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한양에서 내려온 봉세관이 힘깨나 쓰는 천주교인을 동원, 세금을 걷으면서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1901년~1904년에 벌인 이 사건 이후, 제주도는 ‘야소교’에 대한 증오로 반(反)기독교 정서가 짙게 형성되어 더 이상 외국인들이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이 일로 샤머니즘이 강한 이 땅이 영영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뜻하신 것을 모두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셨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사람의 눈에는 나쁜 소식으로 보이는 이 사건을 하나님은 놀랍도록 선한 일로 바꾸어 쓰셨다.
자국인에 의한 선교지, 제주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전략은 ‘스테이션 미션(Station Mission)’이었다. 선교지에 필요한 병원과 학교 등을 세우고 그곳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선교지의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더 이상 외국인이 올 수 없게 된 제주도는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바로 스스로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치(自治)’,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自立)’, 스스로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는 ‘자전(自傳)’하는 교회로 운영됐다. 또 그런 사건을 주님은 허락하셨다.
마펫 사무엘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단이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참가하여 이같은 한국에 대한 선교보고를 전세계 선교사와 선교전문가들 앞에서 나눴다. 이런 한국교회의 건강한 독립성은 당시 세계 선교계의 큰 이슈와 도전이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올 수 없게 된 제주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들어오도록 주님은 허락하셨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가 한국교회 첫 선교지인 제주로 파송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더욱 놀랍게 역사하고 계셨다. 제주에서 사도행전 16장 9절의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성옥 선교사
필자는 2011년 교회개척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교회 영역을 섬기던 중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2016년 2월 제주로 보내심을 받아 제주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교회 첫 선교지 살리는 공동체 100년> (김인수 지음, 제주 성안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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