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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병으로 잇따라 소천…한국에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

▶ 유진 벨 선교사와 아내 로티, 아들 헨리, 딸 샬롯과 함께(출처: 유진 벨 재단)
조선선교열전 (12) – 전라남도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2주년을 맞고 있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생업을 포기하고, 첩과 헤어지고

목포의 초기 신자들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복음의 능력을 증거했다. 40세 전후의 김윤수는 오웬 선교사의 진료실에서 연로한 어머니의 손을 치료할 때 전도를 받았다. 얼마 후 그는 당회 모임에 나타나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술을 만들어 파는 생업을 갖고 있었다. 그 역시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다. 김윤수는 학습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며, 다른 생계수단이 있는지 찾아볼 것을 권면 받았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다음 시험 때 나타나 직업을 바꾸었으니 학습반에 넣어달라고 했고, 이후 세례를 받았다. 그는 부인과 어머니, 장모를 예수께 인도하고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다. 오랫동안 그는 광주교회의 시무장로로 섬겼다.

또 다른 성도였던 김영진의 이야기는 선교 초기 몹시 다루기 힘들었던 일부다처제 문제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김영진에게 있어 복음으로 인한 가장 큰 고통과 승리는 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 그 시대 사람들이 흔히 그랬듯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해 첩을 들였다. 젊고 고운 김영진의 첩은 아들과 딸을 낳아주었다.

그러나 김영진은 이 문제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문제를 충분히 각성하고 1908년에 첩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는 첩에게 기와집과 살림을 장만해 주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6년간 생계비와 자녀들을 기를 양육비를 주며 대가를 치렀다.

김영진이 이 믿음의 결정을 한 이후 상당한 고난이 뒤따랐다. 첩의 오빠와 장모는 이 결정에 화가 나서 그를 때리고 옷을 찢었다. 그녀의 오빠는 칼을 들고 선교사 촌까지 좇아오기도 했다. 후에 그는 본처와 다시 합쳤는데 그녀는 김영진보다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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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웬 선교사(출처: 한국기독교회사)

그러나 어디든 교회가 일어나는 곳에서 선교사들의 희생도 따랐다. 목포 선교부가 생겼던 초기 1898년 11월에 이 땅을 밟았던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0년에는 북장로회 여선교사 화이팅(Georgiana Whiting)과 결혼해 네 자매를 두었지만, 지방 순회 전도에 열중하다가 폐렴이 도져 1909년 4월 3일 별세했다.

목포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가던 중에도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벨 선교사의 부인 로티 위더스푼(Lottie W. B.) 선교사가 풍토병과 심장 발작으로 1901년 4월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벨 목사는 전주까지 가는 지방 선교 여행을 하느라 목포를 떠나있었다. 전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문을 받고 바로 출발했지만 목포에 도착했을 때는 부인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아들 헨리와 두 살배기 딸 샬롯을 두고 3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벨 목사 부인의 사망은 한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소천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마을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사택 건축공사를 돕고 한국인 어학선생과 오웬, 스트레퍼 선교사까지 동거하는 집안 살림을 꾸리는 데 어려움이 컸다.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유모를 동반하지 못해 새 유모를 맞는 과정도 쉽지 않았고, 집안일을 돌보는 시골 하인들이 서구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편 벨 목사는 시골의 전도여행과 선교회 활동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어.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거야. 나로서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없지만 해야만 해.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어.”

장례를 마친 벨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에 한국으로 다시 와서 1904년 광주로 이사하기까지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 후 일 년도 되기 전 오웬 의사와 그의 부인은 피치 못할 건강문제로 스트레퍼 선교사 한 명만 남겨두고 고국으로 떠났다. 처녀 선교사 홀로 이 땅에 남은 것이다. 목포 선교부는 얼마간 닫기로 했다. 6개월 후 전주에서 사역했던 레이놀즈 선교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목포 선교부에 배치되었다. 이후 1903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페어맨 프레스톤(Fairman Preston) 목사 부부가 오자 목포 선교부는 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참고문헌: <한국선교이야기>(조지 톰슨 브라운 지음, 도서출판 동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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