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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슬픈 이야기가 필요하다

▲ 빈센트 반 고흐의 'Irises'(1889). vincent-van-gogh-gallery.org 캡처

예술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최고의 예술은 결코 움츠러들거나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예술은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슬픔이 담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까? 이 세상 어떤 위대한 이야기에 큰 슬픔이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의 작품에 끌렸는지 몰랐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화려함과 슬픔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강, 해바라기, 밤하늘의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경이로움과 투쟁을 잡아내려는 시도이다. 반 고흐의 눈에는 모든 게 아름다움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건 그에게 점점 더 친숙해지는 일종의 긴장감이었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그가 그리려고 했던 평범한 장면을 말하는 방식에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아를에 있는 다리를 이야기한 이 말처럼 말이다.

나는 론 강의 전망을 본다. 거기 있는 트랭크타유의 철교. 하늘과 강은 압생트 색이고, 부두는 라일락 톤, 난간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은 거의 검정색이다. 그리고 철교는 강렬한 파란색이다. 파란색 배경에 밝은 오렌지색 음표와 베로나의 강렬한 녹색 음표가 있다. 아직 끝나려면 한참 멀었지만, 나는 정말 가슴 아픈, 따라서 진짜 가슴 아픈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세계의 위대한 예술 대부분은 슬픔의 장소에서 나온다. 나는 그게 바로 우리가 그 작품에서 공감을 느끼는 이유라고 믿는다. 작품의 주제 자체가 슬퍼서가 아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담아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해서이다.

예술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말이 중요하길 바란다. 듣는 사람과 연결되어 도움을 주길 바란다.

예술가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다리 그림을 보여주려고 그리지 않는다. 다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쪽 강둑에서 다른 쪽 강둑으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다리를 건넌다. 또한 태양이 물 위에서 춤추며 난간에 기대 있는 사람들을 실루엣으로 비추는 동안 서로 손을 잡고 건너는 사람들도 있다.

중요한 건 그 그림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온갖 기쁨과 어려움으로 가득 찬 인생을 한 페이지씩 펼쳐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나를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

슬픈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우리는 왜 슬픈 이야기에 끌릴까? 슬픔, 비탄, 분노, 허무함, 좌절, 괴로움은 복잡하지만 보편적인 현실이다. 이 모두에 관한 본질적인 방식은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감정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상심과 비탄에 대한 이야기이며, 누구나 예외가 없다. 그래서 슬픈 이야기가 울려 퍼질 때 우리는 귀를 기울인다.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 현실을 대비하게 해서이다.

슬픈 이야기는 직접 겪지 않아도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가르쳐준다. 직접 체험할 때 따라오는 고뇌 없이도 얼마든지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희망과 슬픔처럼 서로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는 건 정서적으로 성숙했다는 신호이다. 따라서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연습시킨다. 공감과 연민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슬픈 이야기는 내가 경험하는 슬픔이 얼마든지 고립감을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사실 모든 사람이 다 겪는 현실이라는 걸 알려준다.

슬픈 이야기는 또한 세상에서 만나는 악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G. K. 체스터턴은 동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동화는 아이에게 악이나 추악함에 대한 생각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아이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괴물에 대한 생각을 주는 건 동화가 아니다. 동화를 통해서 아이가 알게 되는 건 괴물과 싸워서 거두는 승리에 관한 첫 번째 명확한 생각이다.

슬픈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한다.

슬픈 이야기는 또한 애통함을 상기시킨다. 애통함은 기도와 결합된 슬픔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물을 때 따라오는 고통이다. 우리는 종종 가장 슬픈 이야기를 일종의 항의로 표현한다. “삶이라는 이 난파선에서 어떤 아름다움이 나왔는지, 이 절망의 나선에서 어떤 믿음이 태어났는지, 이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어떤 소망이 솟아올랐는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때 어떤 구조가 저 언덕을 넘었는지를 보라.” 이렇게 말한다. 고통으로부터 수많은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부서짐과 고통까지 이해한다.

예술은 이어준다

투쟁과 슬픔이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 수준의 예술이 가장 많이 탄생한다. 예술가는 이야기, 메시지, 그리고 자신과 누군지 모르는 대중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다.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

예술이 반드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예술은 이미 진행 중인 대화를 재개한다.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주는 경이로움과 투쟁, 누구나 경험하는 바로 그 감정이다. 예술이 들려주는 이야기 앞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예술의 전달 방식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Van Gogh Has a Broken Heart: What Art Teaches Us About the Wonder and Struggle of Being Alive (Zondervan, October 2024). [복음기도신문]

원제: We Need Sad Stories

러스 램지 Russ Ramsey | 러스 램지(MDiv, Taylor University; ThM,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는 Christ Presbyterian Church(Nashville, Tennessee)의 목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램브란트는 바람 속에 있다>(Rembrandt Is in the Wind: Learning to Love Art through the Eyes of Faith, 두란노 역간)와 Van Gogh Has a Broken Heart: What Art Teaches Us About the Wonder and Struggle of Being Alive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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