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성경묵상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3:26).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라는 말은 한 몸(one body)이라는 점을 말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이에는 구별이나 차이가 없다는 동등성(equality)을 말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본문에서 그저 ‘하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그리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점을 3가지 범주, 곧 인종적 측면에서, 사회적 신분, 그리고 성적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3가지 범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 3가지가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모든 사람을 구별하고 구분하는 척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을 3가지 기준으로 파악했습니다. 첫째는 인종적으로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둘째는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자유인인가 노예인가, 셋째는 성적으로 남성인가 혹은 여성인가는 중요한 판단의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주어진 1세기 상황으로 돌아가 이 본문을 새겨본다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평등’(equality)이라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평등이라는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발전된 개념입니다. 고대사회에서도 ‘평등’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평등이란 말은 자유시민 사이의 평등을 의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노예 대우를 해주고, 자유인에게는 자유인 대우를 해 주는 그것이 평등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분배적 정의였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런 의미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인 차별도, 사회적 신분상의 차이도, 남녀 간의 성적인 구분도 없는 완전한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종적인 장벽이 극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곧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만드셨는가라고 물으면, 유대인들은 “지옥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이방인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만일 유대인 남자가 이방인 여성과 결혼했다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 유대인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한 자는 죽은 것과 동일하다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극복될 수 없는 민족적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이며, 복음의 능력입니다.
자유인이나 노예나
두 번째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종이나 자주자(자유인)의 구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에 ‘종’으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노예를 의미하고, ‘자주자’는 자유인을 말합니다. 인종적 차별을 제거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사회 신분의 벽을 허셨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에는 많은 노예가 있었습니다. 로마시에만 하더라도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 혹은 ‘움직이는 물건’으로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란 지금의 부동산과 같이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보여주는 척도였습니다. 노예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부유하다는 표였습니다. 자유인이 노예와 결혼하면 그 결혼은 신성한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노예의 신분이었고,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는 동등한 부부의 관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회 현실에서 바울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 계층의 벽을 헐고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간의 관계를 말씀하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여자나 남자나 구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키아 윤리학』에서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보았는데, 이것이 로마 사회는 물론 그 이후 사회의 여성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었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윤리였습니다. 바울이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엡5:22)고 하신 후,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지극하게 사랑하라고 하셨는데(엡5:25,28), 이런 가르침은 당시로 볼 때는 혁명적인 요구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민족적 장벽, 사회적 신분, 그리고 성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윤리입니다. 기독교가 꿈꾸는 사회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John Stott)는 에베소서를 주석하면서 책 제목을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God’s New Society)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꿈꾸는 사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는 민족적(ethnic) 차이, 사회 계층적 신분(social status), 그리고 성(gender)의 구분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사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연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진정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상규 교수 | 전 고신대 교수. 현 백석대 석좌교수. 교회사가로 한국교회 사료 발굴에 기여했으며,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과 개혁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교회와 개혁신학> 등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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