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우·김선경 집사 부부 (선한목자교회)
302호 | 사람풍경
교회 청년 공동체에서 만나게 된 정우와 선경. 선교 훈련과정을 함께 섬기면서 자연스럽게 커져 버린 사랑으로 2016년 7월 9일, 웨딩마치를 울렸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의 첫발. 그리고 찾아온 새 생명의 축복.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배 속 아이가 아프다는 의사의 말. 이어진 병명은 에드워드 증후군이었다. 이는 18번 삼염색체(trisomy 18)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치명적 증상이 많아 90% 이상은 생후 6개월 이내 사망하고 5% 정도만 1세까지 생존한다고 알려져 있다. 배 속에서도 언제 떠나보낼지 모른다는 진단이 떨어졌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던 것이 벌써 7년이 지났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하는 예랑이와 함께 해온 우정우, 김선경 집사 부부의 7년간 이어온 믿음의 순종 이야기가 펼쳐진다.
– 아픈 아이를 키우며 지금까지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김선경(이하 김): “결혼하고 자녀 계획은 따로 없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언제가 됐든지 감사히 받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7개월 만에 아이가 생겼어요. 매월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했죠. 하루는 목투명대 검사를 하는데 정상에서 약간 수치가 벗어났다고 했어요. 그때 제 나이가 37살이었기 때문에 기형아 검사를 하라고 했어요. 기형아라고 해도 어차피 아이를 낳을 건데 뭐가 중요한가 싶어서 검사를 하지 않았어요. 물론 두려운 마음도 있었어요. 그래도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의 경우, 기도하면 변화시켜주시고,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봐 왔기 때문에 기도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언제 아이가 아픈 걸 알게 되셨죠?
김: “임신 20주차가 지나면서 정밀 초음파 검사를 했어요. 당시에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성우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저보다 먼저 임신하신 분이 있으셔서, 제가 태동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을 아시고는 검사하러 가기 전에 초코우유를 먹으면 아이가 잘 움직인다는 팁을 주셨어요. 그래서 초코우유를 먹고 검사를 하러 갔어요. 검사를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한참을 보셨어요. 누워 있는 시간이 오래되니까 어색하기도 해서 ‘아이가 잘 안 움직이죠? 그래서 초코우유도 먹고 왔어요.’라고 어색함을 풀어 보려고 했죠. 잠깐 나갔다가 다시 부르겠다고 하더군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 다음 산모의 검사는 빨리 끝났어요. 그때 이 검사가 오래 걸리는 게 아니란 걸 알았죠. 다시 검사를 하고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했어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했더니 안 좋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했어요. 머리에 물혹이 많고, 구순구개열이 심하고, 가장 큰 문제는 심장이라고요. 드라마에서 볼 것 같은 일이 저에게 벌어진 거예요. ‘치료해주면 낫나요?’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태중의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했어요”
–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김: “아무 말도 못하고 병원을 나왔어요. 너무 울고 싶은데 참았어요. 그 자리에서 울면 내가 나를 감당 못할 것 같았어요. 그저 주님 이름만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엄마, 우리 아기 아프대. 어떡해.’ 소리 치면서 우는데 제가 제 몸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더군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알렸어요. 신랑이 왔을 때, 예배를 드리자고 했어요. 남편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죠. 그때 왜 그 찬양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날 구원하신 주 감사’를 불렀어요. 가사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 상황이었어요. 우리 지금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감사로 찬양을 고백하면서 눈물로 예배를 드렸던 게 하나님의 은혜였던 거 같아요.”
– 우 집사님은 소식을 듣고 어떠셨어요?
우정우(이하 우): “아내의 전화를 받고 아내가 너무 정신 없이 울어 아내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어요.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다음날 지인이 소개해준 병원에 가서 양수검사를 받았어요.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어요.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에드워드 증후군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내가 가장으로서, 장애 아이를 키우는 것과 아내가 받았을 충격들을 어떻게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흔들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침착하게, 최대한 담대하게, 무덤덤하려고 노력했어요.”
– 가장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셨겠어요.
우: “사실 임신 소식을 처음 듣고 내가 아버지가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기도를 했어요. ‘주님. 저는 장애 아이는 키울 수 없습니다. 저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입니다.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들도 건강한 아이를 잘 낳으니까 우리도 평범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듣고 주님이 나의 믿음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했어요. 목투명대 검사 수치가 두껍게 나와도 실제로 건강하게 나오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님만 붙들고 기도했어요. 양수검사할 때도, 주님을 붙들고 있었어요.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주실 거라는 믿음을 놓지 못했어요. 그런데 양수검사 결과 에드워드 증후군으로 판명나니까 그때는 자신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과대평가하신 건 아닌가?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여러 이야기를 들어왔죠. 저는 키울 자신이 없었어요. 아내에게 얘기는 못했지만 제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어요. 이 아이를 내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예배는 드리면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었어요.”
– 얼마나 어렵고 당황스러웠을까요.
우: “에드워드 판정을 받았을 때가 임신 22주차였어요. 우리나라는 임신중절 수술이 금지였는데, 아이에게 심한 장애가 있을 때는 24주 이내에 낙태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우리는 낙태가 법적으로 가능한 범위에 있었어요. 갈등과 고민이 있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니 아이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수술을 해야 하나? 건강한 아이를 지우는 게 아니야. 도덕적으로도 문제없어. 나 스스로 설득하고 있었어요. 그때 정신적으로도 무너져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회사에서는 배려를 해주셔서 일이 적은 부서로 이동시켜주셨어요. 수술의 유혹이 있을 때 퇴근하고 돌아와 아내와 예배를 드리면서 펑펑 울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셨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났어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인데 주님이 원하시면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예배 가운데 있었어요. 예랑이는 태명이었어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였는데, 예랑이를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이 부어져서 예랑이를 낳기로 결정했어요.”
– 그렇게 예랑이 출산을 마음 먹게 되신 거군요. 김 집사님은 어떠셨어요?
김: “저도 에드워드 진단을 받고 마음이 무너졌지만, 한편으로는 어차피 살 수 없는 아이라고 하니까 지울까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어요. 당시 수술은 합법이었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도 못했죠. 저는 계속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술하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게 너무 분명하게 붙들어졌어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온 게 영향이 컸어요. 그래서 저도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어요.”
– 당연한 결정이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죠. 이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겠죠.
우: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처음 교수를 만난 때가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 차트를 보고 ‘오해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중절 수술을 해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수술하려고 온 게 아니라 아이에게 최대한 적극적인 케어를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래요? 해봅시다.’라고 하셨어요.”
김: “임신 기간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어요. 병원 가는 게 힘들었어요. 다른 산모는 초음파 사진도 갖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안주셨어요. 대기하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죠. 초음파 검사하면서 화면을 볼 때,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인사하고 기도했어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제가 임신당뇨도 있으면서 음식도 조절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다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아 힘들었어요. 초반에는 밤에 눈을 감는 것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무서웠어요. 제가 울면서 억지로 밥을 먹는 거예요. 어떻게든 먹어서 애를 살려야 하니까. 그래도 항상 예배드리면서 우울을 이겨내고 기쁨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태동으로 하나님께 속한 생명 확신
– 어려운 시간이지만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주님이 주신 은혜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김: “임신 7개월 정도 됐을 때, 어머니 권유로 복음학교 섬김이를 가게 됐어요. 아이가 배 속에서도 언제 떠나보낼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복음을 들려줘야 하지 않겠냐는 이유였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십자가를 참으신’ 찬양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졌어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랑이는 장애가 많은 아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예랑이는 가장 완전한 아이였죠.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이고 사랑이었어요. 찬양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울면서 기도했죠. 그리고 말씀을 듣는데 ‘이게 태동이구나.’ 느낄 수 있을만큼 아이가 움직였어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서 아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셨어요.”
– 기쁘셨겠어요. 예랑이는 언제 태어났죠?
김: “2017년 10월 7일에 태어났어요. 자연분만으로 낳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머리가 보였는데 아이 심장이 움직이질 않았어요. 급하게 배를 눌러서 아이가 겨우 나왔어요. 보통 태어나면 울어야 되는데 아이가 울지 않았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불안했는데 그때 1초도 안되는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그 울음 소리가 너무 예뻤어요.”
<이상 302호에 게재>
우: “아이가 나오자마자 바로 입에 호흡기 같은 것을 넣고 심폐소생술 같은 게 진행됐어요. 입에 있던 걸 뽑았을 때 살짝 울었는데,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곧바로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졌어요.”
– 상황이 급박했군요. 아이는 어땠나요?
김: “중환자실은 정해진 시간에 면회만 됐어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갔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 나왔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태반도 닦이지 못했고, 기도삽관이 돼 있고, 약이 너무 많이 달려있고 앙상한 뼈에 가죽만 덮여있는 느낌이었어요. 구순구개열이 심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주님만 불렀어요.”
우: “의사는 늘 유산될 수 있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랑이를 처음 보는데 마음이 무너졌어요. ‘주님 의지하면서 잘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장애도 심하고 앙상한 상태에서 주삿바늘이 꽂혀있는데 마음이 무너졌어요. 아빠로서 ‘이 아이를 책임져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무너짐 자체였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경험도 없고,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은 새로운 일이었어요. 우리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매일 두 번 면회를 가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간호사가 제게 사인을 받았어요. 아이가 숨을 안 쉬어서 여러 조치를 한 것이죠. 급하게 아이를 살려놓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은 거였어요.”
– 태어난 이후의 예랑이 상황이 궁금해요.
우: “의사는 예랑이가 오래 못 살 거라고 했어요. 한 달을 이야기 하더군요. 에드워드 아이들은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심장 수술을 빨리 해야 하는데, 아이가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서 심장 수술을 안 하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집에서 엄마, 아빠 품속에 있다가 하늘나라 갈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노력해보겠다고 하셨어요. 우리도 허락하시는 날까지 면회를 가고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얘기한 한 달을 넘기고 있었어요. 교수님이 어느 날 오시더니 심장 수술을 하자고 하셨어요. 아이의 눈빛을 보는데 점점 또렷해지고, 아이에게도 살려는 의지가 보인다면서요. 그러나 우리는 아이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욕심에 100% 산다는 보장도 없는데 수술을 한다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았죠. 그런데 교수님은 몇 번을 우리에게 수술을 생각해보라고 하셨죠. 이러는 와중에 제가 복음학교에 가게 됐어요. 이건 결혼하면서 장모님과 약속했던 것이었죠. 그러나 너무 가기 싫었어요.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데 대충했어요.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은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복음학교에 참석했는데, 처음엔 말씀이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수요일에는 반납한 차 키를 훔쳐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이틀만 버티자 생각했죠. 목요일이 됐을 때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있는데 내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보았어요. 예랑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아이를 덜 힘들게 하는 게 부모로서 당연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내 마음을 보았어요. 요한복음 13장 1절에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됐어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너졌어요. 나는 예랑이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입으로는 예랑이를 위해서 심장 수술을 안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 고꾸라져서 펑펑 울고 ‘제가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기도하면서 수술을 하겠다고 결정을 했어요. 예랑이는 12월 24일 첫 번째 심장 수술을 했어요. 그리고 산소 공급을 위해서 기관 절개술을 했어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첫 번째 심장 수술받다
예랑이는 이때까지 기도삽관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퇴원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호흡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게 된 것이 기관절개술이었다. 보통은 코에 줄을 끼워 산소를 공급하지만 예랑이는 코와 입이 연결돼 있었으므로 목을 절개하여 관을 삽입하는 기관 절개술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 아이에게 또 큰 수술이 있었네요.
김: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못들었는데 수술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게 아이의 목소리 듣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 아픈 결정을 했죠. 예랑이는 신생아중환자실에 5개월을 있었어요. 1.45kg로 태어난 아이를 집에서 케어가 가능할 만큼 키워서 퇴원 교육을 받고 집으로 왔어요. 그게 2018년 3월이에요. 이제는 의료진이 없이 반 의사가 돼서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처음엔 무서웠어요. 아픈 아이인데, 가정용 인공호흡기로 산소를 주고, 콧줄로 먹여야 했어요. 하루는 우유를 주사기로 줬는데 토를 하고 자지러지는 거에요. 놀라서 울면서 ‘하나님 어떻게 해야 돼요?’ 기도만 했어요. 어떻게 케어해야 할지도 몰랐는데, 아기 예수님께 하듯이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불편한 게 없는지 어떤 자세로 있어야 편한지 생각하면서 아이를 돌봤어요.”
–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보는 게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김: “아이가 집에 온 3개월 동안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면서 지냈어요. 얼마 못산다고 했기 때문에 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 속에서 사니까 내가 못 살겠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지?’ 생각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늘 설교 시간에 들었던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행복하게, 감사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됐어요. 그 이후부터는 마지막처럼 살았어요. 당시 교회 교구에서 성경통독을 하고 있었는데, 예랑이와 성경통독을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한테 어린이 찬양도 많이 들려줬어요.”
– 아이와 말씀과 찬양으로 함께 하셨군요.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사실 기도를 놓치고 살았어요. 상황이 이러니까 솔직히 잘 안됐어요. 아이를 향한 기도를 뭐라고 해야 될지도 몰랐어요. ‘살려주세요.’ 이 기도도 솔직히 잘 안됐어요. 사실 하나님보다 현대의학이 더 위였어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인데,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지 않았어요. 현대의학에서 이 아이는 얼마 못산다고 하니까 그 무게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이한테 마음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헤어질 건데 너무 마음을 많이 주면 힘들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3년 차쯤 됐을 때, 온라인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말씀기도를 하게 됐어요. 기도의 자리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고 시작하는 게 루틴이 됐어요. 이 자리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곳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끝이라는 마음이 부어졌어요. 그전까지 땅끝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서 특별한 곳에 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한 땅끝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곳이 나에게 허락한 땅끝이라면 하나님이 이곳에서 예배받으시는 게 너무 합당하겠다 생각됐죠. 그렇게 3년 이후부터 예배의 자리에 나가게 됐어요.”
헤어질 마음에서 함께 하는 마음으로
–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 속 갈등이 많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겠죠.
김: “병원에서는 아이의 수명을 최고 3년이라고 말했어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3년을 넘기는 거예요. 아이를 바라보는데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어요. ‘하나님, 세상에서 말한 시간을 초과한 거잖아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아이군요.’ 생각되면서 그때부터 제가 제한해뒀던 것을 내려놨어요. 그리고 아이를 마음 다해 사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어느 날 ‘그가 오신 이유’라는 찬양을 부르는데 가사가 은혜가 됐어요.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이라고 고백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은혜가 부어졌어요. ‘어떻게 십자가의 길이 아름답고 눈부실 수 있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십자가의 길은 고통 그 자체이며 짐 같은데, 어떻게 십자가는 아름답지?’ 아이를 낳기 전에 사람들이 그냥 지우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나를 사랑해서 해준 말들이었죠. 그런데 이런 선택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실패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승리였던 거예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아시고도 보내셨고, 그래야만 사망의 권세를 깨트릴 수 있었기 때문에 보내졌지. 아들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셨지. 이게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구나. 이 길을 이미 예수님이 걸어가셨고, 주님이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거구나.’ 이걸 깨닫게 하시는 순간 우리가 아픈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해도 우울하지 않았어요. 매일 기쁨과 감사가 넘쳤어요. 그게 이거구나. 상황적으로는 힘든 게 맞는데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게 축복이구나.”
– 아이를 키우면서 최대 고비는 어떤 거였어요?
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건 석션(suction)을 해주는 일이에요. 보통 건강한 사람은 기도와 식도 사이에 근육이 있어서 기도로 침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주는데, 예랑이는 그게 헐거워서 침만 삼켜도 기도로 넘어가서 항상 석션을 해줘야 해요. 방금 석션을 했는데 또 일어나서 해야 돼요. 침을 삼키면 바로 해야 돼죠. 이것 때문에 마음 놓고 잠을 잘 수가 없고, 늘 한쪽 귀를 열고 선잠을 자야 돼요. 이게 제일 고비였어요. 3, 4년차 됐을 때는 잠을 못자서 피곤이 누적이 됐어요. 통잠을 한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힘이 없던 아이가 힘이 생기면서 아이도 석션하는 게 힘들었던지 손으로 목을 막고 있더라고요. 근데 제가 밤에 짜증이 났던 거죠. 내 힘으로 손을 제치고 석션을 했어요. 피곤함이 극에 달해서 아이 가슴을 두 번 탕탕 치면서 ‘왜그래.’라고 했죠. 다음 날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그 행동이 회개가 됐어요. 피곤해서 짜증을 쏟아 부은 거예요. 아이는 어려움을 표현한 것뿐인데 내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낸 게 너무 미안했어요. ‘아이에게 나의 감정을 쏟아내지 않겠습니다.’ 회개했는데, 한 번이 무섭다고, 또 잘 지내다가 피곤함이 극에 달하면 아이한테 화가 나는 거예요.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불평을 했어요. 이것도 한두 번 반복되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더라고요. 마음으로 한 번 살인하고 나니까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개하고 하나님을 구하게 됐어요. 정말 견딜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주님 이름을 불렀어요. 아이를 케어하면서 자다가 수십 번씩 일어나요. 한숨이 나올 때가 너무 많죠. 그 어두운 밤을 주님 이름 부르면서 견뎌내는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힘든 적은 많지는 않아요. 숱한 밤을 보내오면서 불평했던 시간보다 주님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으로 넘어가게 하신 밤이 훨씬 더 많아요. 이게 너무 신기해요. 잠을 못 자면 짜증이 나는 게 당연한데 이걸 이겨내게끔 주님이 붙들어주신 걸 너무 많이 느껴요. 밤에 예랑이 눈을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요. 그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그런지 그 피곤한 밤을 주님이 넘어가게 하신 것 같아요.”
– 정말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네요. 순간순간 이러한 은혜가 많았을 것 같아요.
김: “교회에서 장애인 주일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어요. 말아톤복지재단의 이헌주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목사님도 자녀가 장애아였어요. 설교를 하시다가 예화에 등장한 아이가 에드워드 증후군을 앓고 있었어요. 이 병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목사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을 만나러 갔는데, 그분 앞에서 울음이 터졌어요. 재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어요. 울면서 ‘제가 에드워드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1년 6개월 됐어요.’라고 말했는데, 그분의 첫마디가 ‘괜찮아요.’ 였어요. 그 말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분의 괜찮다는 말이 크게 위로가 됐어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 “괜찮아요”
– 하나님의 위로가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네요. 어려운 시간을 겪으시면서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요. 남편과 아내에게, 또 예랑이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해주세요.
김: “신랑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다듬으시고 다루신 영역들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나의 모습과 나의 기준과 요구에 묵묵히 따라주고, 부당하다 여길 수 있는데도 나를 용납해주고 품어줘서 고마워요. 억울한 일도 많았을 텐데 반박하지 않고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용납해줘서 고마워요. 예랑이에게는 ‘엄마가 되게 해줘서 고맙다. 우리 집으로 와줘서 고맙다. 너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해주고 그분을 신뢰하게 해줘서 고맙다. 힘들텐데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잘 견뎌줘서 고맙다.’”
우: “아내가 초반에 잠을 못자니까 예민했어요. 2년 정도 우울증 증세도 있었어요. 상황도 힘든데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까지 힘들게 하니까 이렇게 살다가는 나조차도 돌아버리겠다고 생각이 됐어요. 퇴근하고 집 문 앞에서 기도할 정도였어요. 오늘 하루 집에서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지내게 해주세요. 자꾸 싸움이 일어나니까 ‘이렇게는 못살겠다. 끝내야겠다.’ 마음을 먹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내가 너의 가정에 예랑이를 보냈는데, 네 아내가 아니면 이렇게 케어를 못했다. 네 아내니까 이 정도까지 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예랑이가 이렇게까지 지낼 수 없었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이 사람이니까 예랑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성장을 할 수 있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이 마음을 아내에게 나누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죠. 하고 싶은 일도 내려놓고 힘들고 자유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기쁨으로 케어하고 있는 것에서 감사하고, 아내로서 나를 잘 챙겨주고 이해해줘서 감사해요. 예랑이에게는 다른 가정에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게 감사해요. 이전에는 예랑이가 고난이고 십자가라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너무 소중하고 귀한 선물이라고 여겨져요. 복덩어리죠.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워요. ‘예랑아~ 사랑한다.’”
– 끝으로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김: “아이가 커가면서 뭔가를 인지해요. 주어진 상황에서 아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 아이의 심령에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의 심령에 예수님으로 채워져서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 행복함이 충만했으면 좋겠어요. 2~3개월 전부터 예랑이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말씀 한 절을 20번 선포하면서 예배를 드려요. 영혼이 듣고 있을 거예요.”
우: “예랑이가 커가면서 몸이 무거워졌어요. 아내는 허리 척추뼈가 약해서 아이를 들면 안되는데 씻길 때나 병원 갈 때 아이를 들어야 해요.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는 게 필요해요. 둘 중 하나가 아프면 아이를 돌보는 게 어려워요. 둘 다 아프지 않고 아이를 잘케어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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