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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이-팔’ 분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진: Unsplash의 Toa Heftiba

밖에서 보는 이슬람(8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은 언제부터?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대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두 민족 간의 분쟁은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 해안 지역으로 해양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양 민족 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되므로 이 시점이 바로 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 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BC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AD 66년에 제1차 유대-로마전쟁 혹은 유대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발발하여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AD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과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지역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이 지역은 아랍인들 차지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을 건설한 이후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튀르크 민족의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AD 1453)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줄곧 예루살렘을 성도(聖都)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 당시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계속 지배되었다.

반유대인 운동과 바젤 계획

이후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대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대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에서 자기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 계획’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계획에서 ① 유대인 농업, 공업 노동자에 의한 팔레스타인 식민지화 촉진, ② 각국의 법률에 따라 적절한 지역적 또는 국제적 기관에 의해 유대인 전체의 조직화와 결속 도모, ③ 유대인의 민족적 감정 및 의식 강화, 육성, ④ 시온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 정부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예비적 조치 강구 등을 결의하였다.

맥마흔서신과 발포어선언의 모순 속에서 싹튼 분쟁의 시작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이율배반적 약속을 하면서 아랍 민족과 유대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책을 마련하였다. 영국은 먼저 아랍 민족의 협력을 얻어 오스만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독립 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당시 주 카이로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Henry Macmahon)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전시 외교정책의 내용이 담긴 서한을 메카 지역의 태수 후세인(Hussein)에게 전달하였는데(맥마흔-후세인 서한), 그 내용은 한결같이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 종결 후 그 대가로 후세인이 요구하는 아랍지역의 독립(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국가 건설 포함)을 보장해준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서한의 내용을 믿으면서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들고 영국의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하면서 그들의 전쟁 지원을 유도하였다. 영국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이용하여 미국의 대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대인 재벌들의 재정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1917년 11월 당시 영국의 발포어(Balfour) 외상이 영국 국적의 저명한 유대인 로드쉴드(Rothshild)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후세인맥마흔 서신과 아랍인영국의 관계

1915년 7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에게 보낸 서신(1915.7∼1916.3)에서, 후세인은 ‘독립 아랍 정부’의 통치 지역이 아라비아반도,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맥마흔은 전쟁 이후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맥마흔은 서신에서 팔레스타인이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를 고의로 불명확하게 표현한다. 대신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깊은 지역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뒤에 양자 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은 고의로 불명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장래 아랍국가에서 팔레스타인을 제외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랍 측 대표인 후세인이 영국의 이러한 불명확한 내용에 굴복한 것은 칼리프 직에 연연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 8월 30일 자 맥마흔 서한에서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이 칼리프 직 수행을 환영한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후세인은 장차 그 자신이 이슬람 세계의 정치, 군사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프로 취임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맥마흔-후세인 서한으로 독립 아랍국가 건설 약속을 받은 후 1916년 6월 5일 후세인의 장남 알리가 메디나에서 봉기함으로써 반오스만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에 의해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아랍인의 반오스만 항쟁은 처음에는 강력한 오스만 터키군에 비하여 열세였으나 10월 이후 아라비아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가 가담하면서 ‘메카’와 ‘젯다’를 함락하고, 뒤이어 영국-프랑스와 연합 전선을 편 아랍 반란군은 영국군과 홍해 연안에서 오스만 터키군의 통로를 막고 헤자즈 철도를 파괴한 후 팔레스타인 전선으로 북상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1917년 6월에는 아카바 함락, 1918년 10월에는 다마스쿠스에 이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10월 30일 협상국과 터키 간에 무드로스 휴전 조약에 체결되어 전 아랍지역은 4세기간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무너뜨렸다. 중동 전선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함께 싸운 아랍 측의 공적에 대해서 당시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터키 군대를 완전히 격퇴한 것은 아랍인뿐이었다’라고 찬양되기도 하였다.

영국의 상 레모회의와 그 이후

하지만,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렸다.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이후 영국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대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 등이 유대인의 이주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의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유대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는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대인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대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난다.

아랍 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 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유대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 창설을 주도해 나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 민족과 유대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 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 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유엔의 다수 안과 소수 안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조사를 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대인의 지구로 나눈다는 다수 안과 아랍인과 유대인을 포괄하여 연방국을 창설한다는 소수 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 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대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했지만,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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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박사,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2023,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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