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기독교(29)
뉴에이지는 그 사상적 기조가 힌두교의 신비주의와 잇닿아 있다. 오쇼 라즈니쉬는 신이라는 관념은 인간의 내적 병리현상이 외적으로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가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신은 인간의 병리현상이고, 병든 마음이고, 의타증이고, 두려움이며, 편집증이다. 인간은 구름 너머에서 자신을 지원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지원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버지는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신은 아버지로 불려진다. (중략) 역사를 통틀어 하늘로부터 어떤 응답이 왔다는 언급은 없다. 예수 같은 인물에게조차도. 예수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신이 곧바로 도우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의 신을 광적으로 믿고 있었다.[1]
라즈니쉬가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허망한 것을 붙잡고 있다. 예수마저도 결국은 보응 받지 못할 어리석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허무하게 끝났다. 신은 원래 없는 것인데 기독교의 창시자와 그 추종자들은 없는 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믿는 것이라고 라즈니쉬는 보았다. 그에게 있어 신은, 다른 힌두 성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깨달음을 통해 찾아내는 내면의 숨은 본질일 뿐이다. 그 내면 속 본질을 어떤 이들은 자아라고 부르고, 어떤 이들은 신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들은 부처라고 부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신이나 부처는 특정 인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될 수 있는 내면적 상태인 것이다.
나는 당신 속에 있는 부처에게 인사드린다. 당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것을 꿈에서 조차도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한 사람의 부처라는 것을, 누구든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부처됨이야말로 바로 자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본질적 핵심이라는 것이다.[2]
라즈니쉬는 인격적인 신에 대해서 극도의 거부감을 가졌다. 그 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건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이건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신 관념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몇몇 주신(主神)마저도 거부하며 동시에 그 신들로부터 왔다고 하는 경전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3]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경전마저 거부하는 자이니 과연 다른 종교의 경전이 말하는 신을 그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는 평소에 힌두사원이나 모스크가 같은 것이고, 예배당이나 도살장이 같은 것이며, 성자나 도둑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범재신론을[4] 말하였는데, 이는 만물 안에는 동일한 신적 본질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쇼 라즈니쉬보다 서구 사상계에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 바로 크리슈나무르티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세기 후반 탄생한 신지학협회에[5] 의해 공식적으로 예수와 부처의 화신(化身)이라고 공표된 바가 있다. 이 단체는 힌두교의 신비주의를 서구에 전파하고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창립된 유사종교 단체인데, 1994년에는 신지학이 미국종교학술원의 한 분야로 인정될 정도로 국제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힌두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종교 철학 사상의 통합을 주장하며 특히 인간 본질로서의 신 관념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 외에 다른 신적 개념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인격적인 신이란 그에게 있어 불가지론의[6] 대상일 뿐이기에 굳이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이나 진리나 실재, 또는 그밖에 어떤 명칭으로 부르던 간에 그러한 것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책에 의해서도, 성직자(聖職者)에 의해서도, 철학자나 구세주에 의해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아무 것도 그것에 대답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다.[7]
크리슈나무르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을 인간이 사랑한다는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실제로는 인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타자인 신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스스로 경배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미숙함 즉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의 선도자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는 바대로 그는 마음의 절대화를 가르쳤으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신적 대상으로 삼고 깨달음을 그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21세기형 사상가라고 불릴 만하다.
인간은 언제나 각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나 진리를 추구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공포·행복·실망·혼란 같은 것 때문에 그 하나님이나 진리를 따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중략) 그러나 안정되고 유동적이며 민감한 마음은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8]
크리슈나무르티는 종교나 영적 교사 같은 것의 도움이 인간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해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해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힌두 현자들은 위의 두 사람 말고도 바바 하리다스, 라마 크리슈나, 라마나 마하리쉬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신이라는 뉴에이지 사상에 지극히 충실하다.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의 제자로 알려진 무용가 홍신자는[9] 마하리쉬에게서도 배운바가 있다. 마하리쉬는 50년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話頭)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법을 한 힌두 스승이다. 홍신자는 그와의 대화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바로 이 순간, 너는 신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단지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그것만이 확인된 사실이다. 너는 신에 대해서 배웠을 뿐이지 그를 보지는 못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신을 본 것 같은데요.” “너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신이란 마음속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신이란 없다는 말씀입니까?” “흔히 말하는 그런 신은 없다.”[10]
‘흔히 말하는 그런 신’은 다분히 인격적인 신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이건 다른 종교의 신이건 세상에서 주로 말하는 신은 인격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마하리쉬는 그런 의미의 신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람 말고 다른 신은 없다는 뜻이다. 전 세계의 일반적인 종교들이 주로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비해 이 뉴에이지 힌두 사상은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 오쇼 라즈니쉬, 『선, 저 너머의 신비와 시』, 좋은아침, 103-104쪽
[2] 오쇼 라즈니쉬, 『깨달음에 이르는 길』, 자유에세이, 9쪽 -‘붓다’를 부처로, ‘붓다후드(Buddhahood)’를 부처됨으로, ‘중핵’을 핵심으로 수정해서 인용했음
[3]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한다. “힌두교인들은 베다(Vedas)가 신에 의해 쓰여 졌으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믿는다. 만일 신이 그것을 썼다면 거기엔 엄청나게 가치 있는 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다의 99퍼센트는 단지 쓰레기 같은 내용일 뿐이다. 그 쓰레기들은 신이 베다를 쓰지 않았다는 충분한 증거다. 사제의 기도를 예로 들어보자. 사제의 기도는 자신의 암소가 우유를 많이 생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사 제 암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려 주소서.’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다른 사람들의 우유 생산량을 줄여 주소서!’ 신이 이것을 썼겠는가?” 一 오쇼 라즈니쉬, 『아름다운 농담』, 정신문화사, 137쪽
[4] 汎在神論, Panentheism 만물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으로서, 만물이 신이라는 범 신론(Pantheism)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5] 神智學協會, Theosophical Society
[6] 不可知論,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는 사상
[7] 크리슈나무르티, 『자기로부터의 혁명』, 청목서적, 14쪽
[8] 앞의 책 258-259쪽
[9] 27세의 나이에 무용에 입문했고, 33세에 뉴욕에서 데뷔한 후 독특한 전위 무용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하와이 정글에서 홀로 명상을 즐기고, 인도에서 수년 간 힌두 수행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0] 홍신자, 『자유를 위한 변명』, 정신세계사, 283-284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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