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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하나님은 진짜 화를 내실까?

사진: pixabay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시는 이유

하나님의 질투(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는 우리로 하여금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창세기의 시작 부분은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를 갖는 분이기에 참된 신학은 언제나 관계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피조물, 특히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피조물과 적절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지혜롭고 선하신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아담과 결코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셨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 속에는 아담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단순함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겸손에 바탕을 둔 하나님과의 우정이었다.

우리가 욥이 만났던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더이상 직면할 수 없게 된 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욥이 만났던 하나님의 위엄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완전함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그는 변하지 않는 전지함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영원하신 전능을 누린다.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우리는 다윗처럼 말할 수 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관련된 많은 부분이 하나님께도 귀속되어 있음을 안다. 하나님의 “얼굴”(출 33:20), “눈”(그리고 “눈꺼풀”, 시 11:4), “귀”(사 59:1), “콧구멍”(사 65:5), “입”(신 8:3), “입술”(사 30:27), “혀”(사 30:27), “손가락”(출 8:19) 및 기타 많은 신체 부위가 그렇다. 더욱이 우리는 때때로 인간의 감정을 소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읽는다. 그는 종종 질투하거나 슬퍼하신다(신 4:24; 32:21; 시 78:40; 사 63:10).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으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창 3:9).

열정 없는 하나님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발언들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가, 아니면 하나님도 인간처럼 수시로 변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정말로 고통을 느끼거나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일까? 영이신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어디 있냐면서 찾아다니신 것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변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는(시 102:26-28 참조) 것은 하나님에게는 시간(그분은 영원하다)이나 위치(그분은 편재하시다), 본질(그분은 순수한 존재 그 자체이시다)에 있어서 그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변할 수 없으시다(말 3:6, 사 14:27, 41:4).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열정(passions)의 변화”가 없다. 본질상 하나님은 때때로 더 행복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성한 “축복받으심”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행복과 축복 속에서 항상 계셨고 앞으로도 그건 바뀌지 않을 것이다(약 1:17).

불변하는 하나님에게는 열정이 없다. 또는 존 오웬이 말했듯이 “변하는 신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진노와 미움 같은 어떤 감정(affections)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진노와 같은 감정은 겉으로 드러난 의지의 행위 또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쓰인다.

열정은 인간에게나 적합한 내적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분노와 함께 상승하는 혈압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질투(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는 우리로 하여금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하실 때, (노아 시대의 홍수처럼) 때로는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우리는 “여호와의 진노”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겉으로 드러내어 벌을 집행할 때,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분노나 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아간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서 감정이 바뀌어 덜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아간을 하나님으로, 또 하나님을 아간으로 만드는 꼴이 된다(여호수아 7장).

놀라운 하나님의 낮추심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공의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숙이고 낮추신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때때로 인간에게 있는 “열정”을 하나님 자신에게 전가하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전혀 적절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적과 의지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대하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신성한 자신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어떤 피조물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우심으로 창조의 순간부터 피조물에게 몸을 숙여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나타나셨다”(Reformed Dogmatics, 1:100).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흑암의 구름 속에 남아 지금까지 헤매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숙이심”과 “나타나심”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쓰신다는 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사용한 하나님에 관해 쓰인 인간적 언어는 성육신을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놀랍게 성취되었다.

의인화된 그리스도

아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고전 10:4). 오웬에 따르면, 아들은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간의 감정(affections)을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취한다. 그리고 조만간 인간의 본성을 입은 하나님이 움직이는 때가 올 것을 암시한다. 타락 후,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어떤 제도에 대해서도, 또 교회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해서만 있을 뿐이다(Works, 1:350).

이것은 구약을 이해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방법이다. 하나님께 귀속된 이러한 의인화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의 편에서 볼 때 편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아들은 만물의 근본(reason)이시기에(골 1:16), 하나님에 관한 의인화된 언어는 예수님에 관한 관점(prospective)일 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웬은 아들이 “인간의 감정이 깃든 본성”을 취한다는 사실을 성경 저자들이 의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계속해서 의인화 방식(슬픔, 분노, 회개 등)을 써서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덧붙인다(350).

하나님께는 결코 적절하게 귀속할 수 없는 의인화된 모든 표현이 실제로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순간 적절하게 귀속된다. 팔과 눈, 마음과 영혼이 있는 예수님은 슬퍼하셨고(막 3:5), 또 분노하셨다(막 10:14). 불변하시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모든 일이 성육신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가능하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인간의 열정을 표현하는 능력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다. 그는 불변하시지만 변하실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무한한 기쁨을 경험했지만 또한 지상에 있는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까지 경험했다.

항상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는 자신 안에서 아멘이 터지게 하는 모든 약속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고후 1:20), 피조물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모든 진리의 성취이기도 하다. 주님의 손(팔)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결코 짧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다름 아니라 끝까지 구원을 완성하시는 메시아이기 때문이다(히 7:25). 우리는 손을 사용해서 일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손(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종종 인간의 용어를 써서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그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이(골 1:15) 참 인간이 되도록 설정되었기에 그렇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한 이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셨고, 심지어 다가올 미래까지도 볼 수 있는 복을 주셨다. 주님의 신성만큼 중요한 것은 그의 인성이다. 인간의 언어에 맞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숙이고 드러내신 모든 표현이 항상 바라보고 기대하던 것이 바로 성육신의 인성이다. [복음기도신문]

팔과 눈, 마음과 영혼이 있는 예수님은 슬퍼하셨고(막 3:5), 또 분노하셨다(막 10:14). 불변하시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모든 일이 성육신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가능하다.

마크 존스(Mark Jones) | 마크 존스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벤쿠버에 위치한 Faith Vancouver Presbyterian Church (PCA)의 담임목사이다. 대표 저서로 ‘If I Could Speak: Letters from the Womb’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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