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과 신학, 교회 역사 모두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를 드러내신 참 교사이심을 보여주는데, 사실 그는 그 이상이시다. 주님은 영혼의 교육자이시다 ”
예수님이 탁월하신 이유는 매우 많다. 그의 다면성도 그러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은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시다. 미니멀리스트 예술가가 하얀 캔버스 위에 찍은 점 하나 같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는 다차원의 존재이시다. 그리스도, 메시야, 기름 부음 받은 자, 구원자, 친구, 왕, 대제사장, 창조자, 전능자(Pantocrator), 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부활하신 주,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 새 아담/두 번째 아담/마지막 아담, 유대인의 왕, 질고를 아는 자, 세상의 빛, 온 세상의 빛, 위대한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선지자, 사도, 생명의 양식, 랍비, 보혜사, 사자, 어린 양,[1] 이렇듯 다양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를 통해 우리는 그 영광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신성한 탁월함의 영광스러운 병치라고 한 말을 가늠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가 있다. 바로 교육자 그리스도(Christ the Educator)이다. 오늘날 이렇게 부르거나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들린다. 이보다는 교사 그리스도(Christ the Teacher)가 조금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교사 그리스도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칭호이다. 성경에서 주님은 가르치고 또 가르치신다. 그는 가르침의 선지자, 가르침의 왕, 그리고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에 필적하는 지혜로운 교사로 묘사된다. 따라서 교사 그리스도는 정말 적합한 호칭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교사가 아닌 교육자로 불려야 함을 지금 제안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고등교육 행정가나 교수의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과 신학, 교회 역사 모두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를 드러내신 참 교사이심을 보여주는데, 사실 그는 그 이상이시다. 주님은 영혼의 교육자이시다.
교육자 그리스도는 그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분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영혼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흑암과 무지,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며,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이끌어 내신다. (‘교육하다’(educate)의 본래 의미가 ‘이끌어 내다’(ex-ducere)이다.)
그리스도와 파이데이아
교사 그리스도와 교육자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핵심은 교육의 본질에 있어서 결정적인 어떤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고대의 용어로 말하면, 파이데이아(paideia)가 그것이다.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아이들과 관련된 단어인데, 그리스 문학에서 유년기의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성숙한 어른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널리 쓰였다. 고대의 사상이 담긴 이 말은 20세기까지 대부분의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교육 철학을 주도했다.[2]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영적 영역 모두를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훈련과 성숙이다. 파이데이아는 어린이들이 항상 “탁월함” 또는 “덕”을 추구하면서 “아름답고 선한 것”을 이해하고 알아보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그리스 문학 전반에 걸쳐 전인 교육의 최종 목표(telos)는 성숙한 사람(teleios)만이 경험할 수 있는 만족으로 충만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목표(telos)와 성숙한 상태(teleios)는 모두 성경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그리스 단어이며, 이는 종종 “온전한” 또는 “온전함”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파이데이아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것과 관계된 것이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직업 훈련과 같이 무엇을 하기 위해 사람을 훈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3] 파이데이아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고 직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전달은 물론이거니와 습관이나 정서, 전례를 통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변화시키는 진정한 교육이다.[4]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기독교 제자도를 파이데이아와 동일시하며, 예수님을 가리켜 교육자 또는 교사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한 예로 영향력 있는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가 남긴 세 가지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교육자 그리스도’(Christ the Educator)는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과 그 칭호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교육자이신 예수님을 이같이 탁월하게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발견한 이는 비단 클레멘트만이 아니다.
기독교와 파이데이아
교육을 파이데이아로 이해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성경 속 파이데이아의 운용은 분명히 기독교적이지만 파이데이아는 여전히 그 단어 본래의 정체성을 가진다. 헬라어 성경의 가르침은 그 교훈이 생성된 당시의 언어와 세계관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신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두드러진 시대에(유대와 헬라 배경 모두에 해당) 살며 호흡한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파이데이아가 구원의 의미와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고까지 말한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계승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사역과 그 뒤를 잇는 사도들을 보면 이들은 진리의 내용을 배울 뿐만 아니라 모방을 통해 성숙해지는 법을 배울 제자들을 모으고 있다(고전 4:16, 11:1, 요삼 1:11).[5]
성경의 용어인 “제자”(마테테스/mathetes)를 한번 주목해 보라. 우리는 영어에 너무나 익숙하고 상대적으로 고대의 교육은 너무 생소해서 둘의 연관성을 잘 보지 못한다. 제자는 학생이고 학습자이며, 교육자(educator/pedagogue)를 따르는 자이다. 유대의 랍비 전통이나 고대 그리스로만 교육의 많은 형태가 교육자가 제자/학생(disciples/students)을 모으고 마음과 영혼의 성숙을 목표로 훈련한다. 기독교 정체성의 근간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제자, 학생으로 불리며,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위대한 교육자이심을 (종종 간과되기는 하지만 명백하게) 의미한다.
예수님은 물론 왕이시고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그러나 주님은 교육자이시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교육자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니시다. 사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이 통찰력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이 탁월한 진리에 대해 말할 내용이 넘쳐나며, 또한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많은 구약과 신약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영혼을 교육하는 일을 동일시한 이 새로운 통찰에 비추어 새롭게 읽을 수 있다.
한 예로,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보며 고대 세계 전체에 퍼져 있던 파이데이아와 텔레이오스-성숙(teleios-maturity)의 개념을 헬라어 본문이 어떻게 환기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히 2:10).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도 훈육자로 모시고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 12: 5-11).
이 본문에는 우리가 논의하는 것 이상의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롭게 변화된 시각을 가지고 볼 때, 교육자이신 은혜로운 그리스도께 배우고 영혼을 훈련하라는 주님의 초청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기도신문]
[주]
1.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에 대해 예수님이 복음입니다(Seeing and Savoring Jesus Christ)의 제3장(사자와 어린양)에서 의미 있는 묵상을 제공한다.
2. 데이비드 나글(David Naugle)은 여기서 ‘파이데이아’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3.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에세이 “The Loss of the University”를 참조하라.
4. 특별히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의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의 Re-envisioning Theological Education(신학 교육의 재구상)을 참조하라.
5. 제이슨 후드(Jason Hood)는 그의 저서 Imitation God in Christ: Recapturing a Biblical Pattern(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본받기)에서 본받음에 대한 탄탄한 성경 신학적 견해를 제공한다.
조나단 페닝턴(Jonathan Pennington) | 조나단 페닝턴은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해석학 조교수이다. 대표 저서로 ‘Heaven and Earth in the Gospel of Matthew’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