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

하트모양이 된 교회 버드나무. ⓒ 이아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함께 하신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뜻은 예수님께 사명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일과 계획에 주님을 끌어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보냄 받은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현장으로 나를 보내셨어,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지. 주님이 이런 생각을 주셨고, 그 생각을 따라가니 주님의 손길이 이렇게 있어!” 이런 믿음이 실재 된다면 우리의 자부심도 대단해집니다. 관념적인 종교생활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분별력이 없으면 내가 옳고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옳고 선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분별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제물은 무슨 뜻입니까?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제물을 잡아 각을 떠서 내장을 정리하고 피를 빼고 조각을 내서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에서는 산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제물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죽었으나 산 것, 살았으나 죽은 것!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한때 우리 교회 중년 남성들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뒷모습에서 마음이 읽혀질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걱정과 염려와 시름이 가득했습니다. 눌린 마음도 보여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눈물도 났습니다. 뒷모습에서 그 사람의 슬픔, 욕망, 욕구가 그대로 읽혔습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습도 선명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고집스럽게 하나님께 반역하며 걸어가는지! 움직이는 반역 덩어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힘들었습니다. 성도들의 뒷모습을 볼 때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산 제물이 되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평강이 심겨지고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계신 곳에 제가 있습니다!” 하고 말하며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으면 하나님의 뜻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 가치, 논리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는 강력합니다. 돈을 보면, 권력을 보면, 인정욕구를 보면, 편안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끌립니다. 강력한 유혹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유혹보다 하나님을 더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연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라

거듭나지 않았는데 마음이 새롭게 될까요? 마음에 주님이 거하지 않으시는데 마음이 새롭게 될까요? 마음에 주님이 1등 되지 않았는데 마음이 새롭게 될까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오직 주님만 계셔야 합니다. 성찬에 실제로 참여했다면 마음에 주님 계셔야 한다고, 마음에 주님이 왕 되셔야 한다고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사람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편 따라 주님 향한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없고, 좋아했다 싫어했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요 8:26)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 인생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이 많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금방 세상에 유혹당합니다. 실상 우리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세상의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사람을 아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판단하실 것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다면 판단의 영역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저는 판단과도 참 많이 싸웠습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싸울 것입니다. 판단이 죄라는 것을 알기에,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판단이 주님과 관계를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중요하지만 올바른 지혜는 우리 스스로 생산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더더욱 옳은 것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습니다. “저것은 옳다!”라는 생각이 스스로 나온다면 그 생각은 반드시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옳은 지혜를 스스로 알 수 없어, 스스로 분별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판단하지 않을 거야!”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새겨야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판단과 내가 원하는 판단이 부합할 때가 사실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A가 옳다고 판단하셨고, 내 생각에도 A가 옳다고 판단되는 그때 그 판단이 하나님의 것인지 내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까요? 다른 사람이 옳다고 판단된 A라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애통한 마음이 든다면, A는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린 판단이라면 누가 A를 하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내 판단이 분명할 수록 화가 더 납니다. 상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주인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다 해도 화가 동반된다면 나의 판단으로 여기고 회개해야 합니다. ‘판단’의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갈라지게 합니다. 또 판단하게 합니다. 판단의 말을 듣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말을 했을 때 화가 나서 ‘왜 그래!’ 한다면 똑같은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은 짜증의 마침표가 되어야 합니다. 짜증을 묻어버리는 짜증의 무덤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환경에 있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을 때가 오히려 은혜 받을 수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때 오히려 성숙할 수 있습니다. 험한 말을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주님께 묻는 연습을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속이 바뀌어 화가 나지 않는 복입니다. 틀림없습니다.

판단은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 생각에 쑥 들어옵니다. 저는 예전에 성도들의 낯빛을 살폈습니다. 성도들의 말이 두려웠습니다. 무언가 일이 되지 않으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저를 신뢰할까 봐 두렵습니다.

교회 버드나무가 어느 날 하트 모양이 됐습니다. 하트 모양이 됐다고 이성적으로 인식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려고 나무를 하트 모양으로 바꾸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감 나지는 않았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으로 실감이 안 된 시간이 1주일 정도 지나자 버드나무에 참새들이 몰려왔습니다. 참새들이 하트 모양으로 바뀐 버드나무를 쪼아 먹는 것 같아서 교회 집사님과 날마다 참새를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참새는 1주일 동안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참새가 ‘만나’라는 사인을 받고 알아차리자 다음날부터 참새는 버드나무에 오지 않았습니다.

일상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이 교회에 많았습니다. 기적을 많이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면 언제든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욕구와 내 의견을 따라가는 자아를 봤습니다. 그때 나를 신뢰한다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일상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한일임 명예집사님 장례식에서 손자 산하에게 목사님 집에 가서 자자고 했더니 ‘네’ 하고 대답합니다. 산하는 어릴 때 교회 옆 오수가 흐르는 도랑에 빠졌습니다. 돌 사이로 머리가 처박히고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산하를 구출하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산하의 부모는 누가 구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산하는 머리를 꿰매고 다 나았습니다. 1년쯤 뒤 제가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식당 주인이 조금 불량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긍휼한 마음도 들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산하 부모가 떠올라 불렀습니다. 그 식당 가서 전도하고 싶은데, 집사님 부부가 자꾸 떠오르니까 가서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부부가 순종했습니다. 식당에 가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교회에서 왔어요” 하니까 그 식당 주인은 “저 그 교회 알아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1년 전에 거기 앞에서 도랑에 빠진 아이 구한 적 있다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매사 어떤 일이 생겨도 목사가 마음을 지키며 늘 허허, 하고 웃으며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알고 경험했으니, 성도들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어려운 거 맞아, 어렵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잖아” 하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됐습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상처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마음에 깊이 배어서 주님 주시는 생각을 따라가는 연습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옳다고 여기는 판단을 따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망할 짓이었습니다. 제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 많았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 대해 판단할 것이 많으나 아버지 하나님께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님께 들은 것을 말하는 인생 되고 싶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8:28)

‘인자를 든 후’라는 단어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기 전까지 ‘판단’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판단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는 것은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최우선 과제이자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성취하리로다 (사 53: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성취됐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을까요? 왜 판단하지 않는 것도 꼭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가 예수님의 그 고통의 과정에 참여해야만 판단이 떠나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는 것일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그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렸습니다. 허물은 원어로 ‘파람토마’입니다. 본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욕구가 있기에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주님보다 다른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녀도 우리 몸에 살이 됩니다. 자녀가 아프거나 군대에 가면 부모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합니다. 자식이 살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살 된 것을 떼어내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찔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살 된 것을 떼어내려면 엄청 아픕니다. 주님께서 찔리고 아프고 뺨 맞고 피 흘렸던 이유는 우리 죄 때문입니다.

죄는 원어로 ‘하마르티아’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과녁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돈이 살이 된 사람은 돈이 줄어들면 살점이 떨어 져나가는 것처럼 아프다고 합니다. 주님은 살 된 것을 떼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살 된 것을 떼어내기 위해 창에 찔리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못 박히시고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살 된 것은 떼어낼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저도 날마다 죽지 않으면 판단합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판단이 들어올 때마다 저는 죽고 주님을 따라간다고 고백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면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만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만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함께 경험하고 예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중산동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린 성도가 30명이 채 안 됐습니다. 2년 지나니 70명이 됐고 지금은 아이들까지 합쳐 300명 가량 됐습니다. 첫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성전에 성도들이 가득차 의자가 부족해서 강단 앞 바닥에 앉아서도 예배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몇년간 그 기도를 잊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있습니다. 인생의 마침표도 있습니다. 그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은 저주입니다. 세상에서 성취할수록 하나님의 시간표는 실감나지 않습니다. 삶이 재미있고 바쁠수록 인생의 마침표는 실감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실감하라

이제는 주님으로 살겠다고 선언하셔야 합니다. 예수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소원하셔야 합니다. 부족하고 허점 많지만 주님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고 소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꼭 부정적으로만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손길을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10년 동안 주님의 마음 신실하게 보여주셨고 주님의 신실함으로 죽었던 내가 살았고 회복되었고 주님을 더욱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끝까지 변하지 않는 주님의 복 누리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기쁨!
다른 것과 견줄 수 없고 그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 은혜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lee ac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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