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장21~23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는듯한 엄청난 약속을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노예이기도 하다. 이들은 새로운 종류의 노예이다.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 6) 기꺼이 종이 된 자로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다른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의 자유를 통제할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장 35절) 바울은 자발적인 노예 정신을 복음전파에도 적용했다. 그는 자신을 혹독하게 핍박하고, 조롱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자유인이었지만 복음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원칙은 구약 성경에 생생하게 잘 그려져 있다. 출애굽기 21장 5,6절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만일 종이 진정으로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의 상전을 섬기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족인 유대인을 6년 동안만 노예로 데리고 있을수 있었다. 7년째 되는 해에 그 노예는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노예가 자발적으로 계속 노예로 있고자 하면 그의 주인은 그 종의 귀를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었다. 노예의 귀에 뚤린 구멍은 그가 주인을 사랑하기에 자발적으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모두에게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의 자유를 포기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바울은 불신자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의 귀를 뚫은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스스로 종이 된것’은 그리스어 동사인 ‘doulo’, 즉 “노예로 만들다”에서 온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이다.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서 결혼의 구속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8절과 22절에서 우리와 그리스도의 결합을 설명할때도 사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극도로 단단한 결합을 의미한다.(마치 순간 접착제와 같이 엄청난 접착력을 가지 본드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역자주) 바울은 모든 사람과 결합하기 위해서 진심으로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다.
바울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한 것은 이 세상이나 하늘 나라의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인이었지만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그들의 노예가 될지라도 그들의 영혼 구원을 갈망했다. 그는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서도 같은 헌신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죄수가 되었다. 그는 감옥에 갇혔었다. 구타와 채찍질을 당하였으며 그가 탄 배가 난파가 되기도 했고 돌세례도 받았다. 그는 계속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복음을 증거하다 죽음을 당했다. 그는 만약 더 큰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 할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에 이러한 충격적인 편지를 보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장 1~3절)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와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포기해야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권리에 집착했다. 그들은 다른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면서까지도 그들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이에 믿음이 아직 약한 형제들은 흔들릴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잘 나와있는 고린도 성도 사이의 이기적이고 분열적인 성향은 불신자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본을 따르기를 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그가 보여준 본보기는 어떠하였는가? 바로 앞 구절인 고린도전서 10장 33절로 돌아가 보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치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자들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빌 2:4)하게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초점이다. 그는 마케팅 전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유연성있게 변화할것(contextualization 상황화).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복음을 더 구미에 맞게 변화시키는것도, 심리학이나 익살스런 연극, 세속적인 여흥등으로 복음을 대신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절대적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 John MacArthur |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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