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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12 사도 연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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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II. <대체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에 대한 요약
III. 예수의 1차 즉위식과 12 사도
1. 예수의 1차 즉위식
2. 예수의 최초 제자들 
  1) 공관복음과 예수의 최초 네 제자
    (1)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
    (2) 누가복음의 기록
  2) 요한복음과 예수의 최초 다섯 제자
    제1일: 세례 요한(1:19-28)
    제2일: 세례 요한과 예수(1:29-34)
    제3일: 안드레와 요한(요 1:35-40)
    제4일: 시몬 베드로(요 1:41-42)
    제5일: 빌립과 나다나엘(요 1:43-51)

세 번째 “이튿날”(요 1:43)은 곧 제5일이다. 제5일에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요 1:43)라고 요구하셨다. “빌립은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요 1:44)이었다. 예수를 이제 막 따르게 된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라고 하였다. 이는 나다나엘과 빌립이 둘 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던 구도자였다는 뜻이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라고 했다. 그는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서(요 21:2), 같은 갈릴리의 한 동네인 나사렛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라”(1:46)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른바 “브니엘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주셨던 이름이다(창 32:28; 35:10). 야곱은 에서를 두 번씩이나 간사하게 속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생명의 위험을 느껴 도망가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장인 라반과 더불어 속고 속이는 일을 계속하였다.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의 조상 야곱과 비교하며 칭찬하신 줄 알고 크게 당황하여,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요 1:48a)라고 반문하였다. 예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라고 답하셨다(요 1:48b). 그리하여,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요 1:49)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예수의 세례와 1차 즉위식이 공관복음에서만 소개되고 요한복음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세례 요한의 설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개된 것(요 1:32~34)에 이어 한 번 더 간접적으로 반영된 셈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에게 이미 보여주셨던 ‘큰 일’보다 앞으로 보여 줄 ‘더 큰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이미 보여주셨던 ‘큰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을 불러일으켰던 일, 즉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예수께서 그를 우연히 보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그의 묵상과 기도 제목까지 보셨던 일이었다.[1]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집이나 번영을 위한 상징이 되기도 하고(예, 왕상 4:25; 사 36:16; 슥 3:10), 랍비 문서에서는 무화과나무 그늘이 명상과 기도를 위한 장소로 연결된다.[2] 나다나엘의 동료들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어떤 말씀을 묵상하며 어떤 제목으로 기도하였는지에 대해 심히 궁금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더 큰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더욱 궁금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 모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 말씀은 나다나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야곱이 그의 형을 속인 후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를 받고 밧단 아람에 사는 그의 외삼촌 댁으로 도망가던 중에 잠을 자다가 꾸었던 꿈의 내용을 떠올리게 하였을 것이다.

야곱이…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0~13).

이는 곧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던 여러 말씀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on it) 오르락 내리락 하고”(창 28:12b)와 “여호와께서 ‘그’ 위에(on it) 서서”(창 28:13a) 라고 번역한다. 즉, “그”는 “사닥다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히브리어 문법적으로는 “‘사닥다리’ 위”(on it)와 “‘야곱’ 위”(on ‘him)라는 번역이 둘 다 가능하다. 한편, 세 종류의 탈굼들과 유대 랍비들은 “그”라는 대명사가 ‘사닥다리’가 아니라 ‘야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로 해석하였다.[3]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며, 탈굼들과 랍비들의 주석처럼 “그”를 ‘야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였던 것처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가운데 자신을 인자로 칭하셨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다시 찾아오신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1:29,36),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1:33), “하나님의 선택자/아들”(1:34)이라 하였다. 안드레와 요한은 시몬에게 예수를 “메시아”라고 소개하였다(1:41).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1:49)이라고 고백하였다. 한편, 예수는 그 자신을 “인자”(1:51)라고 칭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에 의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던 메시아 또는 메시아에 준하는 여러 칭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김세윤은 예수의 자기 칭호인 ‘인자’를 정확히 옮기자면, “그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고 다니엘이 본 환상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사람의 아들’이다”. 즉 예수는 자신이 환상 중에 다니엘에게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난 그 천상적,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인자 같은 이”를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 번역한다면 이는 예수의 독특한 자기 칭호에 담긴 예수의 의도에 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인자” 칭호는 공관복음에 69번, 요한복음에 13번 나온다.[4] 그런데, 예수의 공생애 기간 최초의 인자 칭호 사건이 바로 나다나엘을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한 직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 모두를 상대로 말씀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1:51)라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심으로 장차 그를 통해 형성될 이스라엘의 내포적 대표자로 세우셨다(창 32:28; 35:10).[5]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내포적 대표자가 되어 그를 통해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6]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진정 비교하고자 하였던 두 인물이 나다나엘과 야곱이 아니라, 야곱과 예수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천사들이 야곱을 방문한 것은 그가 앞으로 형성될 이스라엘의 내포적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세윤은 이 점에 대하여 탈굼들과 유대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 하나님 영광의 보좌에 야곱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내용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늘나라의 천사들이 그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여 그 보좌에 새겨져 있는 야곱의 형상을 직접 보지 못하여, 심히 궁금히 여기고 있다. 그런데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천사들이 동행하였다. 야곱이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돌베개를 하나 취하여 잠을 자게 되자, 그 천사들이 곧바로 그 루스라는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보좌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동료 천사들에게, 야곱을 보려면 빨리 내려와서 보라고 하자, 천사들이 내려와서 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7]

천국에서 천사들의 관심 대상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는 “모든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라는 말씀 등으로 입증된다. 특히, 열국의 아비로 부름을 받게 된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의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장이 되고,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다윗의 세 번에 걸친 즉위식을 통해 유다 왕국을 이루게 될 터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께서 다윗처럼 세 번에 걸쳐 즉위하심으로 메시아 왕국을 이루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서 아람어로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돌로매로 등장한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서 제3일에는 안드레와 요한이, 제4일에는 안드레의 형제 시몬이, 제5일에는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이 각각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다(요 1:43~51). 그들 모두, 즉 다섯 명이 세례 요한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를 방문하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헤르만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 1:44)라는 관점에 볼 때, 빌립, 안드레, 베드로, 그들 모두 한 그룹으로 세례 요한을 만나기 위하여 함께 출발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던 것 같다고 주장한다. 또한, 나다나엘도 그 그룹에 속하였다는 사실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요 1:45)라고 복수 주어를 사용하였음을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8] 앞에서(제4일) 인용된 칼빈의 표현을 활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섯 명이 삼 일에 걸쳐 세례 요한의 학교에서 메시아의 학교로 전학하였다.[9] 이 점에 대해서는 <III. 예수의 3차 즉위식과 제자들>에서 한 번 더 논의하고자 한다.

    제6일(베다니에서 가나까지 이동)

제6일은 예수와 다섯 제자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로부터 갈릴리 가나 마을에서 진행되는 결혼식 참여를 위해 이동하였던 날이다. 이 베다니 마을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제1일부터 제5일까지의 배경이 되고(요 1:28), 예수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역하시던 중에 위기가 닥치자 제자들과 함께 피신하신 곳이 된다(요 10:40~42). 예수께서 거기에, 즉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머물던 중 예루살렘 감람산 동편 기슭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이동하시는데 이때 그의 발걸음은 곧 자신의 3차 즉위식을 위한 첫걸음이 된다.

그런데,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은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중요한 마을을 공관복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왜 요한복음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가? 이 마을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가? 주후 3세기에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요단강 건너편, 즉 동편을 두루 방문하였지만, 베다니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사본에 기초한 영어 성경 킹제임스 버전과 아랍어 성경 벤다이크 버전에서는 ‘베다니’가 ‘베트아바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III. 예수의 3차 즉위식과 12 사도>에서 다루고자 한다.

    제7일: 예수의 첫 표적과 제자들(요 2:1~11)

예수께서는 제5일에 다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을 출발하여 갈릴리 가나 마을에서 개최되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는데, 그날이 곧 “사흘째 되던 날”(2:1)이었다.  따라서, “사흘째 되던 날”이 곧 제7일이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2:12) 이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자, 예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라고 한다.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칭하였을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훗날 십자가에 달리신 가운데서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하며 어머니를 ‘여자’로 칭한다. 이에 대해 고든 벤함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고 마무리하시면서, 그의 모친과 자신을 각각 원시 복음(창 3:15)의 두 주인공, 즉 여자와 여자의 후손으로 일치시킨 사건으로 해석한다.[10]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그가 사역할 대상을 야곱의 혈통적인 후손들로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전 후손들로 확장하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는가? 여기서 그의 “때”는 곧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하실 때이다(요 7:6~8, 30; 8:20; 12:23; 27,31; 13:1; 17:1).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그의 때, 곧 십자가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을 행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필찬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것은 종말적 회복의 순간이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의 성육신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예수의 사역으로 이미 시작된 종말적 새 시대의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포도주가 되기 이전의 물은 허무와 무의미로 충만한 옛 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첫 표적은 이어지는 사건들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11] 

포도주가 되기 이전의 물은 유대교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부어진 물은 허무와 무의미로 충만한 옛 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이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영광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에게 주어질 풍성한 구원을 예고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12] 

예수께서는 나다나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였던 것처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이 곧 그 약속의 성취적 사건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톰 라이트는 “요한에게 이 사건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궁극적인 순간이다.”라고 주장한다.[13] 사실, 하인들도 표적을 보았고, 연회장과 하객들은 새 포도주를 맛보았지만, 그들은 표적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표적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믿었던 자들은 오직 제자들뿐이었다(요 2:11).

  3) 예수의 최초 제자들에 대한 통합적 이해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최초 제자들은 네 명으로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며, 그들이 부름을 받은 현장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중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다섯 명으로 안드레, 요한, 시몬,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이며, 그들이 부름을 받은 현장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이다. 특히, 그들이 각각 부름을 받게 된 시점이 크게 다르다. 그 시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세례 요한의 투옥 시기가 언제이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태복음(4:11~12)과 마가복음(1:13~14)만 의존하면, 세례 요한의 투옥이 예수께서 세례식과 즉위식을 마치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던 중에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의 투옥 사건(눅 3:20)과 예수의 세례 사건(눅 3:21~22)이 연이어 언급된다. 한편, 요한복음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3:24)라고 한다. D.A. 카슨은 이 구절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여기에서(그리고 아마도 요한복음 2~4장 전체에서) 보도한 예수의 사역이 공관복음서들에 기록된 그 어떤 예수의 사역보다도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기록자들은 마가복음 1:4를 기준으로 삼아서, 세례 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하고, 그 이전에 유대에서 행한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14]

한편, 리차드 보컴은 요한복음 3:24의 기능은 곧 마가복음 1장 13절과 14절 사이에 ‘요한복음 1:19~4:43의 사건들’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마 4:17~22; 막 1:16~20; 눅 5:1~11)을 요한복음의 어디에 위치시킬 수가 있겠는지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다.[15] 이에 대한 카슨의 대답은 요한복음 4장과 5장 사이가 된다.[16] 그러나 보컴의 답은 요한복음 4:43과 44절 사이가 된다(요 1:32). 보컴과 카슨의 답을 종합하면, 예수께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다섯 명을 첫 파트타임 제자들로 부르신 직후에 첫 표적을 행하셨고, 둘째 표적 전 또는 후에 갈릴리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중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풀타임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가족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가족을 남겨 두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2:13~4:43). 그런데, 공관복음은 제2일부터 제7일까지, 그리고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등에 대해 침묵한다. 따라서 예수의 최초 제자들에 대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통합적 이해가 필요하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종합하여 볼 때,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예수의 최초 풀타임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후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열거하자면, ① 제1일부터 제7일까지의 여러 사건(요 1:29~2:11), ②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첫 유월절 사역(요 2:13~22), ③ 니고데모와의 대화(요 3:1~21), ④ 예수와 세례 요한의 세례 경쟁 구도에서 펼쳐진 사역과 세례 요한의 특별 설교(요 3:22~30), ⑤ 예수의 첫 사마리아 방문 사역(요 4:3~42), ⑥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첫 유월절 사역을 목격하였던 갈릴리인들이 예수를 영접한 일, ⑦ 예수의 둘째 표적(요 4:46~54) 등이다. 예수의 최초 제자들이 중심축이 되어 열두 사도의 중심축이 된다.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 논의하고자 한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김세윤, 『요한복음 강해』, 45.

[2] D. A. Carson, 『요한복음』, 281.

[3] Seyoon Kim,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J.C.B. Mohr Tubingen 1983. 83.

[4] David Wenhem, 『바울: 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2), 163.

[5]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70), p.246; cf. also Schwiezer, Neotestamentica, p. 284. Quoted in 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255.

[6] 김세윤, 『요한복음 강해』, 48.

[7]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398과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 (서울: 엠마오, 192), 146. 김세윤은 C.C. 롤랜드(C.C.Rowland)의 캠브리지 학위 논문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 문헌에 나타나 있는 에스겔서 1장의 영향」(The Influence of the First Chapter of Ezekielon Jewish and Early Christian Literature, 1974)의 도움을 받아 이같이 밝힐 수 있었다고 밝힌다.

[8] Herman Ridderbos, The Gospel of John, (Eerdmans, Grand Rapids), 1991. 87.

[9] John Calvi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1-10, trans. Thomas H. L. Parker (Grand Rapids: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5), 72.

[10] Gordon J. Wenham, 『창세기1-15』, 박영호 역 (서울: 솔로몬, 2000), 203.

[11] 이필찬, 『이스라엘과 교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90.

[12] 유상섭, 『설교자를 돕는 요한복음』, 63.

[13] 톰 라이트, 『요한복음1』, 44.

[14] D. A. Carson, 『요한복음』, 375.

[15] Richard Bauckham, “For whom Gospels were written?”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1998. T& T Clark Edinburgh, 154.

[16] D. A. Carson, 『요한복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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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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