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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5)

Ⓒ unsplash

이 글은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이 발간하는 [중동연구] 제5권(2021)에 실린 정형남 교수의 <대체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 전문으로, 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편집자>

3. 예수의 3차 즉위식

예수의 3차 즉위식이 총 47일이 걸렸다. 이는 곧 수난 주간 7일과 부활하여 승천까지의 40일의 통합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동편 기슭 베다니 마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린 후에 한동안 숨어지냈다. 그런데, 그가 유월절 엿새 전에 이 마을에서 진행된 잔치 중에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부음을 받았다. 마침내, 그의 수난 주간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곧 그의 3차 즉위식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1)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서 시작됨

예수께서 감람산 기슭 베다니 마을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후에 거의 즉시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으로 가서 머무셨다(요 11:54).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 이름으로 예수 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요 11:47~53; 참조, 7:32). 요한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라고 말한 바를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요 11:56).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의 마을인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 마을 베다니에서 개최된 잔치에 참여하셨다(요 12:1). 그날 이 마을에서 개최된 잔치에서 예수께서 종말의 메시아로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 의해 향유로 부음을 받았다(요 12:1~3). 이는 구약의 제사장, 선지자, 왕의 경우에는 올리브 기름으로 부음을 받은 것과 대조가 된다.

2) 유월절 닷새 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나귀타고 입성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 날 즉 유월절 닷새 전에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그들은 곧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것을 직접 보았거나, 그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들었던 자들이었다(요 12:17~18). 이 장면은 유대의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 사건 직후 군중들이 예수가 바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선언하고 그를 억지로 붙들어 즉석에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요 6:14~15). 그때는 예수께서 군중들을 피하여 혼자서 산으로 가셨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군중으로부터,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환호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베다니에서 떠나셨다(요 12:12~13). 그런데, 그는 베다니 옆 마을인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이해하기가 힘든 행동을 하셨다. 그의 두 제자를 통해 미리 준비해 둔 나귀 새끼를 타셨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9~38; 참조, 요 12:14). 훗날 사도 요한은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5)라고 구약 말씀을 인용하는 가운데,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요 12:16).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백마를 타고 오셨는데, 그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칼로 심판을 받은 대적자들이 흘렸던 피였다(계 19:11~16). 또한, 사도 요한은 환상에서 먼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자들도 보았다. 그들은 곧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 (계 7:9),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하였다(계 7:10).

3) 사탄의 폐위와 예수의 즉위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명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를 받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를 뵙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기뻐하셨다. 이는 그동안 그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 7:30; 8:20)라고 말씀하셨던 점과 크게 대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땅에 떨어져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하나의 밀알이 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암시하셨다(요 12:25~25). 그러나 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셨다(요 12:27 상). 그 후에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a~28a)라고 기도했다.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다음과 같이 울렸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b). 곁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예수께 말했다고도 했다(요 12:29). 예수께서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라고 하셨다(요 12:30). 그리고 그는 그 소리를 다음과 같이 사탄의 폐위와 자신의 즉위로 해석하셨다.[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1~32).

사도 요한은 예수의 이와 같은 해석을 “이렇게 말하심”이라 하며, 이는 “자기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라고 해석한다. 카슨은 요한의 해석이 곧 예수의 수난과 영화를 통합시킨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의 해석에서 다섯 가지 강조점을 찾아내어 설명한다. 카슨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2]

   ⓵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이다. 이 심판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어서 그의 수난에서 정점에 달하는 것도 보여준다. 세상은 자신들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계속해서 판단하고 평가한 후에,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그에 대해 심판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 즉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였다.

   ⓶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는” 때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사탄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패배였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을 따르는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용을 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계 12:11). 예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고 하늘로 “들려서” 즉위한 바로 그때, 사탄은 폐위되었다.[3] “이 세상의 임금”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힘은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철퇴를 맞는다(요 16:11).

   ⓷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그가 “땅에서 들리는” 것에 해당한다(요 3:14; 8:28). “들리는 것”이라는 개념과 “영화”라는 개념은 이사야 52:13에 함께 나오는데, 거기에서 “들리는 것”은 여호와의 종이 높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에서 ‘어떠한 죽음’이라는 어구는 일차적으로 죽음의 방식 자체(십자가형, 요 21:19)를 가리키지만, 이 대목 전체의 취지, 즉 예수의 죽음은 그의 영화로 가는 길목이자 그 구성분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암시한다.

   ⓸ 이러한 수난과 영화, 또는 이러한 죽음과 높아지심이 가져오는 결과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속에서 그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이끄는 것(참조, 10:16; 11:52)을 공식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십자가와 높아지심, 즉 그가 “들린” 것이었다. 이것은 그를 찾아왔던 헬라인들에 대한 암묵적인 대답이었다.

   ⓹ 이러한 이중적인 극적인 전개는 강조의 의미를 담은 “이제”(요 12:31) 아래서 진행된다. 이 부사는 이 절들을 앞에 나오는 23, 27절과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임박한 사건들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에 대한 심판, 사탄의 멸망, 인자의 높아지심, 사람들을 땅끝에서부터 이끔 –이 모든 일은 종말의 때에 일어나게 되어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종말의 때는 이미 시작되었다. 종말의 때를 위해 유보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죽음과 높아지심 속에서 그 결정적인 한 걸음이 내디뎌지게 될 것이다.

4) 예수의 성찬식 제정

유대교에서는 유월절을 비롯한 3대 축제가 중요하다. 이슬람에서는 유대교를 모방한 한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대축제가 중요하다. 그것은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의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제물로 바치려다가 갑자기 등장한 양을 대체 제물로 제사하였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어떤 축제가 있는가? 그것은 곧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 중에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거행하도록 선포하셨던 성찬식이다(마 28:17~29; 막 14:22~25; 눅 22:14~23; 고전 11: 23~25).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후, 결정적인 순간에 이삭을 대신하는 대체 제물로서 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허락하셨으며, 그곳이 곧 성전 터가 되도록 하셨다는 점도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하여 드려졌던 대체 제물은 하나의 그림자였다.[4] 그리고 그림자의 실체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 이래로 수없이 드려졌던 대체 제물들의 실체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와 골로새서의 저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각각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품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 위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히 8:5a, 표준새번역).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참 형상, 개역개정)가 아니므로…(히 10:1a,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몸, 개역개정)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6~17, 표준새번역).

대체 제물, 성전,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로 대표되는 구약의 관습들이나 율법은 그림자일 뿐이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림자의 실체이시며, 참 형상이시다. 그렇기에, 구약에 기초한 유대교는 그림자이고, 구약과 신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다. 사도 바울의 적대 세력들은 그리스도께서 실체로 오셨음에도 여전히 그의 그림자에 집착하는 가운데 바울을 핍박하고 그의 복음에 대하여 대적하였다(골 2:16~17).[5]

예수 그리스도가 대체 제물의 실체로 밝혀졌다는 것은 그의 보혈로 구속함은 교회 공동체도 실체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실체적 존재가 된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으로 제정(制定)하시고 선포하신 성찬 예식을 거행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빵(떡)과 잔으로 각각 기념한다. 그것은 유대교의 대체 제물과 3대 축제와 그 축제와 관련된 것들의 각각이 그림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 예수는 전통적인 유월절에 먹고 마시는 음식을 그의 몸과 피로 대체시키셨다. 유월절 떡과 음료는 그림자였으며,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실체로 밝혀진 것이다. 그렇기에, 톰 라이트(Tom Wright)는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을 기독교 공동체 또는 교회 공동체가 출애굽 공동체의 성취적 존재로서 누리는 축제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완성으로서, 유대교의 상징들, 특별히 출애굽을 연상시킬 수 있는 상징들을 자신의 상징으로 취한 공동체이다(고전 10장).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성찬식은 교회가 진정한 출애굽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축제였다.[6]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마 26:29; 막 14:25)는 가운데 배설되는 잔치 또는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눅 22:16)는 가운데 펼쳐지는 잔치라고 하셨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가 시행하는 성찬식은 신랑 예수와 신부인 그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천국 잔치의 맛보기이다.

5) 반어적(Ironic) 즉위식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수를 재판하면서 사면의 관습에 따라,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그를 유대인들에게 놓아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그리하여,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종용하자, 그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었다.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답했지만,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요 19:19-20).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라고 하자(요 19:21), “내가 쓸 것을 다 썼다”라고 답했다(요 19:22). 게리 버지(Garry Burge)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단지 이야기의 역사적 세부 사항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분별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빌라도에 의해 재판을 받는 동안 “왕”이라는 호칭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 속에 있는 깊은 아이러니가 겉으로 드러나도록 이야기를 구성한다. 예수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이것은 그의 대관(즉위, 등극)식이다.[7] <계속> [복음기도신문]


[1] G. R. Beasly-Murray, 『요한복음』,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444.

[2] D. A. Carson, 『요한복음』, 819-822.

[3] “이 세상의 임금”은 요한복음에만 나오지만(14:30; 16: 31), 신약 다른 곳에 분명한 전례가 있다(고후 4:4; 엡 2:2).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 12:7-9에서 사탄 및 그의 사자들과 우주적인 “하늘 전쟁”이 일어나는데, 거기에서 “내쫓김”으로서 패배한다. 그 말은 한 구절에서 세 번 나온다. 이 세상 임금은 쫓겨나고 새로운 임금 즉, 적법한 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때”는 “마귀가 사람들에 대한 폭정에서 폐위되는 것”이고, 동시에(“때”) 참되신 왕이 즉위하는 것, 인자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정옥배 역, 『존더반 신약주석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19), 598.

[4] O. Palmer Robertson, 이스라엘』, 오광만 역, (서울: 그리심, 2002), Robertson, O. Palmer. 『하나님의 이스라엘』, 오광만 역, (서울: 그리심, 2002). 13. “옛 언약 아래 있던 이스라엘 땅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새 언약 아래에서 이루어진 실체와 본질과 성취와 대조되는 그림자와 예표와 예언의 범주에서 생각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설명을 참고하라.

[5] 다니엘 J. 에버트 IV. 『지혜기독론』, 곽계일 역, (서울: P&R,2012), 162.

[6] Tom Wright,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최현만 역, (경기도: 에클레시아북스, 2014) 142.

[7] Garry Burge, 『NIV 적용주석: 요한복음』, 김병국 역, (서울: 솔로몬 2010),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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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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