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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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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이 발간하는 [중동연구] 제5권(2021)에 실린 정형남 교수의 <대체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 전문으로, 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편집자>

III. 초림 예수의 세 번에 걸친 즉위식

다윗의 세 번에 걸친 즉위식, 다윗 언약과 즉위 시, 종말의 메시아, 그리고 “인자 같은 이”의 즉위식 등은 초림 예수의 메시아 왕국의 세 번에 걸친 즉위식을 이해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또한, 다윗의 즉위식들은 예수의 즉위식들을 위한 그림자가 되고 예표가 되고, “인자 같은 이”의 즉위식은 초림 예수의 메시아 왕국의 즉위식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유기적인 관계임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림자나 예표 그리고 예언의 역할을 하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공동체는 실체와 성취의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1. 예수의 1차 즉위식과 그 전후의 세례 요한

회개의 설교와 세례가 세례 요한의 주 사역이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에 1차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얼마 후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의 제자들이 되도록 이른바 제자 양도식을 거행하였다.

  1)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세례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할 자로 구별되었다(눅 1:15~17). 그는 예수와 친족 관계로 그의 모친의 복중에서부터 동정녀 마리아의 복중에 성령으로 잉태된 태아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기뻐하며 반겼다(눅 1:39~56). 우리는 그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새 시대의 마중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1) 회개의 설교와 세례

세례 요한의 사역은 유대 광야에서(마 3:1) 이렇게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2~4; 막 1:2; 참조, 눅 3:4~6).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회개의 징표로 그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았다(마 3:5~6; 막 1:5).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참조. 눅 3:7~9)라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그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였다.”(눅 3:15). 그리하여 그가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참조, 눅 3:1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문맥에 따르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메시아의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회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아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메시아의 불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이 메시아의 불세례는 곧 그의 심판이다. 이는 불세례가 언급되기 전과 후에 언급된 “불”이 심판의 목적으로 각각 사용된 것으로 입증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눅 3:9).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 눅 3:17).

한편,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메시아의 성령세례만 언급되고, 불세례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물로 세례를 받게 된 신자들만 등장하고, 불신자들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막 1:8; 행 1:5). 정리하자면, 회개하여 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심판 날에 알곡으로 분류되어 곡간에 들어간다. 한편, 회개하지 않아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곧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이 되어 도끼에 찍혀지는 나무 또는 쭉정이와 같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

    (2) 임박한 메시아의 출현 예고(요 1:19~28)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단강 건너편 마을 베다니의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묻도록  하였다(요 1:19, 28). 그들에게 자신은 메시아나 엘리야가 아니라고 그는 답하였다. 또한,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제2의 모세로 일컬어지는 메시아(신 18:15, 18)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라고 하였다(요 1:23). 또한,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왜 그가 메시아도 아닌데 세례를 베푸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자,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더라”(요 1:26)라고 답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앞에서 공관복음에도 소개되는데(마 3:11; 막 1:7; 눅 3:16), 거기에는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라는 문장이 없다.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임박한 상황이 더욱 고조된다. 이는 곧 세례 요한 자신이 현재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메시아가 곧 출현한다는 뜻이었다.

    (3)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또는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17; 막 1:9~11; 눅 3:3, 21~22).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요한복음에는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요단강 건너편의 마을 베다니에서 맞이한다(요 1:29~39).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주신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소개하며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받으셨을 때 그 위에 성령이 내리는 것을 직접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요 1:28)라는 구절과 그들의 만난 시점을 알려주는 “이튿날”(요 1:29)을 통합하여 해석하면, 예수의 세례 터는 곧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위치함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 베다니가 공관복음에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한편, 요한복음은 이 베다니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요 1:19~51; 3:26; 10:40~42).

    (4)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요한복음에는 세례 요한이 그를 찾아오신 예수에 대해,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물렀더라”(요 1:32)라고 한다. 이는 곧 세례 요한이 적어도 사십일 이상 전에 일어났던 예수의 세례 사건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세례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주셨던 명령과 약속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며 어떤 약속을 하셨다(요 1:33b). 그 약속은 메시아가 그에게 나아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그 위에 머물게 하여 그를 구별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일컬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기초하여 나사렛 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을 때를 간절히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5) 예수의 세례

마침내,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요청하셨다(마 3:13; 막 1:9; 요 1:28). 그러나 그는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였다(마 3:14). 마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것 같이 처신했다. 사실, 그가 그동안 선포하였던 설교 주제는 회개였고, 그의 물세례는 죄인들이 회개의 징표로 받는 세례였다. 한편,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로 그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바와 달리 자신이 예수께 세례를 받겠다고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a).

이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 요한을 위하여 특별히 주셨던 말씀이다. 예수의 첫 설교의 청중은 단 한 사람으로 세례 요한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그들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 “우리”가 되었다. 하나가 된 “우리”를 통해 “모든 의”를 이루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가 되어 거행하였던 예수의 세례식이 어떻게 “모든 의”를 이루었는가?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세례식 직후에 그들의 행적을 각각 따라가 보자.

2) 예수의 1차 즉위식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크게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 하늘이 열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렸다(마 3:16; 눅 3:21). 마가복음은 “하늘이 갈라짐”이라고 표현한다. 김세윤은 그 점에 대하여 “하늘이 ‘갈라짐’은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마가의 표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비는 이사야 63:19 하반 절(70인역: 맛소라 텍스트에서는 64:1)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예수의 세례가 이 예언서의 기도를 성취하게 하는 것으로 마가가 암시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한다.[1]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환상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소명 받을 때 주어지는 것으로(겔 1:1), 곧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는 현상은 유대 묵시문학과 신약(요 1:51; 행 7:56; 10:11; 계 4:1)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림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이 갈라지는 가운데 성령이 예수 위에 가시적으로 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며 주셨던 약속에 대한 성취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2] 예수 당시 유대교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와 더불어 성령 역사는 단절되었고 종말에야 성령이 다시 임한다고 믿었으며(욜 2:28~32), 이사야 42:1이나 11:1을 메시아적으로 이해하여 종말에 주께서 그의 ‘종’이나 다윗의 ‘가지’에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 48:16; 6:11). 그 점을 기초하여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린 사건에 대해 김세윤은 세 가지 주장을 펼친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하나님 자신의 종말의 사자로 불러 성령으로 기름 부었으며, 셋째로 하나님 자신의 종말론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성령의 힘으로 무장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3]

성령이 비둘기 같은 가시적 형상으로 임하셨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주관적인 일인데, 세례 요한을 위해 객관적인 일이 되게 하셨다(참조, 요 12:30).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세례와 더불어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다.[4]

  (3)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같이 성자 예수 위에 내렸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막 1:11, 마 3:17; 눅 3:22). 이 말씀은 시 2편 7절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와 이사야 42장 1절의 “내 기뻐하는 자라…”가 통합 인용된 것이다.[5] 시 2편은 다윗이 그의 후손들을 위하여 기록한 즉위 시이다. 다윗의 후손들이 즉위할 때 두루마리 성경이 펼쳐져서 시 2편이 낭송되는 가운데 선포되었다. 그렇지만, 성자 예수의 즉위식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 즉위식의 주인공인 나사렛 예수가 곧 그의 아들이라고 친히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진정한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밝히는 가운데, 그를 곧 이 땅에 임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제 이사야 42:1이 인용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로 시작되는 말씀에 담긴 메시지를 살펴보자. 이사야 42:1부터 시작하여 53장 끝 절까지 계속되는 말씀 속에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을 김세윤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주의 종은 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되고, 성령으로 무장되어(사 42:1; 61:10), 그의 백성을 구원하여 모으며(사 42:7; 49:5~6; 61:1 ff), 새 언약을 세우며(사 42:6; 49:8),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드리며(사 52:13~53:12),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전달하는(사 41:1; 61:1) 등의 임무를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6]

예수께서는 세례식 직후에 종말의 메시아로 즉위하셨다. 하늘이 열리는 가운데 베풀어진 즉위식을 통하여 그는 종말의 메시아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고, 특별히 이사야가 선포하였던 그의 백성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드렸던 여호와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3) 1차 즉위식 후의 예수와 세례 요한

예수께서는 그의 세례식과 즉위식이 끝난 직후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가? 또한, 그의 즉위식을 지켜보았던 세례 요한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1) 예수의 광야 생활과 세례 요한의 투옥?

예수께서는 그의 세례식과 즉위식이 끝난 직후 광야로 가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의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사십일 째에 마귀가 그를 찾아와 세 번 시험하였다. 예수께서 그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각 이긴 후 하늘에서 온 천사들한테 섬김을 받으셨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이 부분에서 우리가 공관복음만 의존하면, 예수의 광야 사십일 기간에 세례 요한이 투옥된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의 광야 사십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요 3:24)라는 구절이 있다. D.A. 카슨은 이 구절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여기에서(요한복음 2~4장 전체에서) 보도한 예수의 사역이 공관복음서들에 기록된 그 어떤 예수의 사역보다도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기록자들은 마가복음 1:14를 기준으로 삼아서, 세례 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하고, 그 이전에 유대에서 행한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7]

한편, 리차드 보컴은 “요한복음 3:24의 기능은 마가복음의 독자에게… 마가복음 1:13과 14 사이에 ‘요한복음 1:19~4:43의 사건들’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호숫가에서 그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마 4:17~22; 막 1:16~20; 눅 5:1~11)을 요한복음의 어디에 위치시킬 수가 있겠는지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에 대한 카슨의 답은 요한복음 4장과 5장 사이가 되고, 보컴의 답은 요한복음 4:43과 44절 사이가 된다(요 1:32).[8] 이는 곧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전이냐 아니면 후이냐가 되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다섯 명을 그의 첫 파트타임 제자들로 부르신 직후에 그의 첫 표적을 행하셨고, 그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중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풀타임 제자들로 부르셨으며, 그 시점은 곧 그의 둘째 표적 전에 또는 후에라고 정리할 수가 있겠다.[9]

  (2) 세례 요한과 예수의 재회

세례 요한은 그가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그를 다시 찾아오신 예수를 맞이하였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다시 찾아오셨던 목적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서 그의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로 두 번에 걸쳐 선포하였다. 한 번은 첫 번째 “이튿날”(요 1:29~34)이었고, 또 한 번은 두 번째 “이튿날”(요 1:35~40)이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 1:29~34).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36)

카슨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로 직접 설교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성경학자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적하며,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기사 전체는 복음서 기록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이해를 세례 요한에게 투영해서 마치 세례 요한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창작해 내었다는 것이다.[10]

카슨은 “이러한 회의주의적 경향은 오늘날의 일부 해석자로 하여금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지를 묻지 않고(그들은 그러한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단지 복음서 기록자인 요한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만을 묻게 만든다”라고 비판한다.[11]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사실, 그 주제로 진행된 그의 설교가 공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 소개된 설교들은 그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선포되었던 것들이다.

앞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건이 어떻게 “모든 의”를 이루는 사건이 되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보자고 했다. 예수께서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계실 때, 세례 요한은 그가 친히 거행했던 예수의 세례식과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셨던 예수의 즉위식에 대한 회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요 1:29~34; 36)라는 주제의 설교를 준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예수의 즉위식 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선포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 짐,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식으로서 세례식을 그가 집행하였고, 그렇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예수를 곧 그의 즉위식을 통해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음을 진지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뜻 중의 하나는 곧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대체 제물로 드렸던 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의 실체가 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대체 제물의 실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최초로 깨닫고 선포한 자가 되었다.

첫 번째 “이튿날”(요 1:29)이 연대기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바로 그 “이튿날”에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를 통해 적어도 사십일 이상 전에 거행된 예수 세례 사건을 기억하며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그를 시험하는 마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천사의 수종을 받으며 회복하신 후에 베다니 마을을 다시 찾아오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이튿날”(요 1:29)이라고 언급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선포하였다. 한 번은 첫 번째 “이튿날”(요 1:29~34)이었고, 또 한 번은 두 번째 “이튿날”(요 1:35~40)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이튿날”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양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산드라 윌리엄스는 첫 번째 “이튿날”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 현장에 그의 제자들이 없는 가운데 설교를 독백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2]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 준비를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지에 대한 그녀의 탁월한 관찰력이 엿보인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요 1:29)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이튿날” 그 현장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없었다는 윌리엄스의 주장에는 동의하고, 그 현장에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세례 요한과 함께 계셨다고 해석하여 보자. 이는 곧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 양도식을 위한 리허설로서 설교를 하였다는 뜻이 된다. 또는, 첫 번째 “이튿날” 거행된 양도식 현장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예수를 따라가고자 하는 자들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 “이튿날” 또 한 번의 제자 양도식이 거행되었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이튿날”에 마침내 그의 두 명의 제자가 그 제자 양도식이 진행되는 현장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 둘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요 1:35~40). 하나는 안드레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이다(요 1:35~40).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와 세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준비되었던 구체적인 그의 열매가 바로 예수께 양도해드렸던 안드레와 그의 무명의 친구였다. 그 무명의 주인공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라 추정되고 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김세윤, 『예수와 바울』, (서울: 도서출판 제자, 1995) 15.

[2] 위의 책, 16.

[3] 위의 책, 16.

[4] “싸비이인들”(Sabaeans)은 세례 요한 추종자들로서 성령이 예수 위에 임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필자가 바그다드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그들의 성전에서 필자가 확인한 내용이다.

[5] 김세윤, 『예수와 바울』, 25.

[6] 위의 책, 25.

[7] D. A. Carson, 『요한복음』, 박문재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17), 375.

[8] Richard Bauckham, “For whom Gospels were written?”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1998. T& T Clark Edinburgh, 154.

[9] Richard Bauckham,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문우일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10] D. A. Carson, 『요한복음』, 259.

[11] 위의 책, 259.

[12] Cartin H. Williams, “John (the Baptist): The Witness on the Threshold, Character Studies in the Fourth Gospel, (Mohr Siebeck, Tubingen, 2013),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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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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