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손은식 칼럼] 용서 받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사진: 프레이포유 제공

모든 이야기는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 같이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바뀌는 시간을 거쳐 오직 하나님만 저의 주가 되는 길을 걸어가려고 매일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비참한 일, 힘들었던 일, 숨기고 싶은 일들을 간증 하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시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또한 이 간증문을 쓰면서 하나님을 알기 전 인생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걸어온 길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 재중 교포로 살다가 한국에 온 39살 장인호입니다. 한국에 온지는 7년 6개월 정도 됩니다. 제가 7살 때 저의 어머님은 유방암으로 돌아가셨고 그 후 저와 동생은 길림성 용정시에 계시는 외할머니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초, 중, 고, 전문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저와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두 부모님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림 받으며, 불쌍한 아이라는 단어가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동네 분들의 눈에도 그렇고, 이웃들도 그런 생각이고, 친척마저 저와 동생을 한 인격체로 대하는 게 아니라 불쌍하고 안됐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해준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땅을 치며 하늘을 보면서 부모님을 많이 원망 하였습니다. “왜 자기들의 뜻대로 우리를 태어나게 해 놓고 이렇게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로 만드냐고…”

제가 어릴 적에 부러웠던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 또 하나는 어린이날에 엄마,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 가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은 어린이날에 손잡고 놀이공원 담벼락 주변을 한번 도는 게 다였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눈에는 눈물이 점점 말라가고 마음은 더욱 더 냉정하고 악하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저는 전문대까지 졸업하고 첫 직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동성 일조시에 있는 중한 합작 회사 통역사로 입사했습니다. 월급은 800위안(16만원) 정도 였습니다. 그때 이런 다짐을 하였습니다. 어릴 적에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 입고 싶었던 옷, 하고 싶었던 일 들을 하나, 하나 다른 사람들 보란듯이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이 술입니다. 지금은 알코올 중독자란 이름도 달고 다닙니다.

첫 회사에서 통역을 하면서 참 재미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무실 실장님의 통역을 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컨테이너 출항을 못했습니다.”라고 말 하니까 실장님께서는 저를 보면서 “비 내리지 와서가 뭐야, 이렇게 통역하면 밥 값이나 하겠냐?”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사람이 먹는 밥 같고 뭐라고 말을 들으니 슬프기도 하고 한국 분들이 쪼잔하게 보였습니다. 아무튼 통역을 하면서 망치에도 맞아보고 한국의 욕은 그때 다 배운 것 같습니다.

그 후 전자회사, 액세서리 회사를 다녔고 회사 생활에 질린 저는 다시 식당일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한국으로 올 기회가 생겼습니다. 처음 비행기를 타 보는 촌놈이라 전날 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하고 전철을 타고 대림역에서 내려 길을 걷는데, 이게 한 시간 걸리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다시 왔나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인지 중국인지 대림동에서는 도무지 분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후 6주 학습과 3일 교육과 3시간 교육을 받고 외국인 등록증을 받는 순간 저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습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좋은 여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어 보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일자리는 중국집 설거지였고, 두 번째는 국수집이었습니다. 처음 월급은 180만원. 매달 집에 100만원 입금하고 나머지 돈으로 집세, 전화비용, 교통비용 내고 좀 빠듯하게 생활하였는데 두 번째 국수집에서는 월급을 좀 더 많이 받아서 용돈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6~7년만 고생하면 나의 꿈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즈음, 한국에 메르스가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주 버티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사장님은 저에게 한 달 휴식하고 다시 출근하라는 통지를 하였고 저도 그동안 힘들었으니깐 좀 쉬고 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 달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다 지나가도 식당에서 연락이 없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식당에 가보게 되었는데 제가 일 하던 자리에서 다른 분이 일 하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사장님의 친척 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되는 상황이었고 또 메르스도 완전히 지나가지 않는 시기여서 정직원은 커녕 일용직도 힘들었습니다. 직업 소개소에 찾아가 한 달에 6만원을 내고 일하고 싶어도 여자 일용직 자리도 없는데 남자인 저로서는 한 주에 많으면 두 번 아니면 한 번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2~3개월 버티다가 돈이 떨어지고, 돈 생길 구멍은 없었습니다. 제일 힘들 때 새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왜 몇 달 집에 입금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 있기에 오히려 돈 좀 보내달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게 가족과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그 후 저는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나오게 되었고 신세계 백화점 앞 사거리에서서 어디로 가야 될지 몰랐습니다. 막막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노숙 생활을 하게 되었고 거리 바닥을 돌아다녔습니다. 목적지 있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처음 노숙하는 저는 어디에서 밥을 주는지도 모르고 그냥 거리 위에서만 버린 음식들을 주워 먹었습니다. 제 기억에 지금까지 제일 맛있었던 음식은 중국 영사관 담벼락 옆에 떨어진 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진장 배고플 때 먹었기 때문입니다.

거리에서는 못살겠다고 한강 대교로 올라갔다가 실패하고 내려오고, 손목도 두 번 유리 조각으로 그었는데, 드라마나 영화처럼 쉽게 죽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사람이 굶으면 며칠 만에 죽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물을 먹지 않으면 삼 일, 밥을 먹지 않으면 칠 일. 그것을 보고 남산에 올라가 금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3~4일 지나갔고 이쯤이면 어지럽거나, 힘 없거나, 하늘에 별이 보여야 될텐데 저는 아무 증상도 없었고 배만 무진장 고팠습니다. 그때 그 빵을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빵을 주워 먹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거리에 노숙하는 분들을 보면 왜 노숙하고 있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내 꿈이 노숙자이기 때문에 노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8개월 정도 길에서 떠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길 고양이와 개도 불쌍하다고 아침, 저녁으로 사료를 준비해 주는 사람은 있지만 사람인 나한테는 찬 국물조차도 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사람들이 많은 곳과 시선을 피해 거리를 걸으면서 쉴 곳을 찾아다닐 때 프레이포유(손 목사님과 김재남 형제님과 유 목사님)을 만났고 좀 긴 시간의 대화 끝에 프레이포유 살림공동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살림공동체로 가는 길에서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왜 노숙인 저를 데려가려고 하지? 기껏 해봤자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아무튼 거리에서 노숙하는 것 보다는 나을 거야.’ 하지만 공동체에 도착해서 보니 비와 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비록 아무 가정용품도 없는 텅 빈 집이지만 그래도 노숙했던 저에게 있어서는 따뜻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공동체에서 하루 푹 쉬고 이튿날부터 저는 손 목사님과 김재남 형제님을 따라 가방에 간식을 넣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기 시작하였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다른 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 하는데 긴장된 저는 하나님 어머니를 부르면서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놀란 목사님은 저를 불러 하나님은 아버지 한 분 뿐이지 어머니는 없다고 말씀한 기억도 납니다.

이렇게 몸은 편안하게 지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근심이 가득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내가 얼마나 여기 있을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 또 다시 거리 생활을 할 게 뻔한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솔직히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쁜 척, 감동 받는 척,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척, 기도를 열심히 하는 척, 착한 척, 척, 척, 척,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짓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마음속에서 폭발하고 저는 무너지고 결국 술 먹고 공동체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공동체 사역자 자립기금 은행 카드를 제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카드에서 40만원을 빼서 여관에서 며칠 동안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방 값이 다 떨어진 마지막 날, 12시가 되면 나가야 되는데 그때 마침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 왔습니다. 침대에 앉아 한숨을 쉬며 공금을 사용 하였으니 나는 다시는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하겠구나, 어디로 갈까? 생각하는 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떡 진 머리, 희미한 정신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정신이 똑바로 들었습니다. 문 앞에 목사님 서 있었고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몰라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는 저희 아버지를 팔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이렇게 술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또 다시 거리로 나갈까봐 두려워서 손 목사님과 형제님들의 동정심을 얻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과 형제님들은 저의 거짓말을 믿고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위로를 받는 저의 거짓된 마음은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술 먹고 거짓말 하고 공금도 사용한 저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 주신 목사님과 형제님들을 보면서 저 또한 이런 생각도 하였습니다. ‘다음부터 열심히 잘해야 되겠다. 최소한 목사님과 형제님들을 실망 시키지 않고 보답해야 되겠다.’ 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이 없고 사람한테 인정받고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니 가면 얼마나 긴 시간을 가겠습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더 잘 해보려고,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 보려고 저의 생각을 보태서, 아니 제 생각대로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인정과 칭찬보다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나는 분명히 잘하고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날이 갈수록 저는 힘들어 지고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불만들을 결국 또 술로 해결 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금 먹기 시작하였는데 한 번, 두 번 지나서 다섯, 여섯 번째는 결국 또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한 달 쯤 되었을 때 종로 좁은 방에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또 저 보고 술 먹은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저 또한 이런 저런 거짓말로 넘겼고 목사님께서 다시 저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 반성문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을 믿어 보자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진짜 생각 외의 일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에게 목사님께서 프레이포유 사역 팀장 자리를 맡기셨습니다. 내 입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팀장 직을 맡을 수 있을까?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두 경험을 생각하며 첫 째는 내 생각을 버리고 시키는 대로 할 것, 둘 째는 목사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 할 것이라는 규정을 스스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공동체에 4~5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각자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아무튼 같은 곳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한 일은 해야 되겠고, 또 형제님들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겠고, 솔직히 중간에 낀 삶이 재미없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을 믿어 보자고 생각하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또 제 생각대로 하였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남자들이니깐 술 한 잔 먹으면서 풀고 내일 다시 일 하자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또한 술 먹으면 절대 목사님 한테는 비밀이고 들켜도 혼자 먹었다고 하자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생각 밖에서 터졌습니다. 목사님께서 지시한 일들은 그나마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술로 인한 목사님의 불시 검문에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매번 술을 혼자 먹었다고 하는데 다른 형제님들에게 물어 보았을 때는 저 하고 함께 먹었다는 말이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발생하자 저는 목사님께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혀 버렸고 지금까지 벗지 못하였습니다. 전 또 이 일로 술 먹고 넘어지고,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주풍도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 공동체에서 나가 한 달 동안 고생을 하였습니다. 들락날락 몇 번 했을까요? 저의 생각에는 열 손가락 가지고 모자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한건 한 번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마음속에 느낌은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부터인지 저도 하나님께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도가 어느 순간 응답 받기 시작 하였습니다. 앞만 바라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지만 한 번 제자리에 서서 조용히 뒤를 돌아볼 때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또 거리에 계시는 분들과 공감하고 손잡고 기도 할 때, 그 순간을 위하여 어릴 적부터 어제까지, 아니 지금도 저를 단련시키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내고, 많은 후회를 하고, 많은 아픔을 겪고 나서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게 허전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실망과 원망과 분노를 더 하였을텐데 지금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분노하며 예전에 많은 것을 잃었고, 감사하면 요즘에 하나님께서 저를 변화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전혀 변한 게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속마음과 생각부터 변화시켜 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만 보다 감사, 질투 보다 칭찬, 내 생각 보다 네 생각, 증오 보다 사랑, 왜 보다 응당 등…

하지만 저의 주변 사람들은 제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말씀할 때가 있습니다. 농담도 있고 진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매일 더 기도 합니다. 저를 더 변화시켜 달라고, 예수님의 형상과 성품을 더 닮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입으로 백 번 변화 되었다고 말한들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그뿐인데 주변에서 제가 변했다고 말한다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인호> [복음기도신문]

손은식 목사 | 2013년 말부터 서울 시내의 노숙자와 홀로 사는 어르신을 돕고 기도하는 프레이포유 사역으로 이 땅을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손은식 목사와 프레이포유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사역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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