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에 대한 마지막 글입니다.
먼저, 7년간 구제를 실천하며 거리에서 손과 발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다녔던 프레이포유가 구제에 대해서 한 번 글로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느 날 생겼습니다.
둘째로, 구제에 대한 말씀에 크리스천의 생각이 이토록 명확하게 둘로 나뉜 적도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셋째로, 구제에 대해서만큼 각 개인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동떨어져 있었던 적도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구제에 대해 너무나 명확하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6장 초반부로 글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형제님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게 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예를 들어서 글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위 말씀을 읽을 때, 혹은 설교할 때 항상 ‘오른손’과 ‘왼손’이라는 단어와 뒤따라 나오는 ‘은밀한’ 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과연 위 말씀을 전한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도 이 세 단어에 초점을 맞추셨을까요? 말씀을 듣는 우리가 오른손과 왼손의 쓰임새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에 주목하기를 바라셨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아닌, “오른발이 하는 것을 왼발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혹은 뇌과학이 발달한 현재에는 “우뇌가 하는 일을 좌뇌가 모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던지 그것은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곳에 초점을 맞추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알아야합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구제 생활은 하되 본인과 구제받는 대상자와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똑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기부자, 대상자는 내 돈과 정성을 받는 수혜자. 나와 그를 구분하고, 사람과 사람간을 분리하고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차별합니다. 분리와 구분의 시작점이 바로 차별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구제에 대한 말씀도 결국 구제를 하는 사람이 구제를 받는 사람에 대한 차별에 대해 말씀하고 싶은거예요. 현재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차별이 더 심해요. 2천년 전 유대인과 똑같아요. 내 것을 받는 사람과 자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대상자가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나도 잘 가지지 못하는 선물을 받으면 안 되지.’ ‘나도 잘 못가는 곳엘 가면 안 되지.’
그러기에 대상자가 나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호텔 부페는 당연히 안 되지.’ ‘뷔페식당에 가서도 기부자인 나와 마주치면 안 되지.’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급식 장소가 폐쇄되어 거리의 분들께 식사 대용 식품을 드리는데, 그것을 보면서 주변의 분들이 ‘코로나 19로 거리의 분들께 편의점 도시락 4900원짜리를 줘? 나도 비싸서 못 사먹는데? 말도 안 돼!’라는 분이 의외로 많이 계시더라구요.
그러기에 나보다 더 편안한 집에서 잠을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상자가 아무리 현재 상태가 무너져도 내가 사는 집보다 더 비싼 집에 살면 안 되지.’ ‘한강이 보이는 전망이 좋은 집에 살면 절대 안 되지.’
베푸는 사람의 마음에 대상자가 본인보다 더 잘 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니 구제를 받는 대상이 나보다 더 잘 되면 그게 말이 되요?’ 라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이미 차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차별은 마음 속에서 거짓 의로움을 만드는 촉매제가 됩니다.
나는 그와 다르다는 의로움. 그는 단순히 받는 대상이지만, 나는 주는 자라는 의로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는 의로움. 그렇게 구제하는 본인의 모습을 보며 그 의로움은 더욱 강화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라고 하셨던 거예요. 구제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구제를 통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셨던 거예요. 구제하려고 시작한 일이 차별의 마음으로 진행되어 결국 스스로 구원의 선물까지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셨던 거예요.
구제하려는 마음에 차별의 마음이 스며들면 곧 쉬이 훼손되고 변질되기 때문이예요. 순전한 마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거예요.
율법을 잘 지키는 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자라고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방법으로 거짓 의로움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말씀이 또 다른 율법이 되어 우리 마음에 거짓 의로움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
그러므로, ‘나는 구제를 해도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안 할거야.’
‘내가 돕는 대상자가 내 이름을 절대 알아선 안 돼.’
‘내가 후원하는 기관에서 절대 내 이름을 드러내선 안 돼.’
‘나는 은밀하고 비밀하게 구제하는 예수님의 제자야.’
‘그런데 프레이포유는 방송에 왜 이리 자주 나와? 자기 자랑을 하려고 소외계층 사역을 하는군.’ ‘후원자도 많겠지? 돈 맛을 알았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단체구나.’ ‘구제는 은밀하게 해야지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짜 구제인데 말이지.’
위의 생각과 행동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만약 여러분이 오른손 왼손의 법칙에 빠져서 구제 행동을 하고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2천년 전 유대인의 외식의 또다른 복사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결론은 의외로 짧고 간단합니다. 우리가 구제할 대상에 대한 이해, 구제할 때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거리에 쓰러진 분, 좁은 방에 계신 분.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분, 홀로 길을 헤쳐나갈 수 없는 분, 그분을 돕는 이유는 바로 한 가지. 그분이 내 형제요, 내 이웃이요, 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만약 지금 이 땅에 우리와 같이 숨을 쉬고 계시다면 분명 그분들에게로 찾아가셨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로 가서 “당신은 저의 형 혹은 아우, 아버지 혹은 어머니 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내 작은 발걸음과 작은 정성, 그리고 내 작은 손길과 기도를 받아주세요.”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매주 계속 찾아가는 거예요. 왜냐구요? 그들은 우리 형제, 자매, 가족이니까요. [복음기도신문]
손은식 목사 | 2013년 말부터 서울 시내의 노숙자와 홀로 사는 어르신을 돕고 기도하는 프레이포유 사역으로 이 땅을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손은식 목사와 프레이포유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사역일기를 소개한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