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교회의 십자가 복음 회복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전 세계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며 교회의 개혁을 외치며 부르짖고 있다. 이에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상황과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종교개혁의 의미와 교회사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살펴본다. <편집자>
종교개혁 전야
서양 중세사회의 도덕은 극도로 타락했다. 제도적으로는 혼전관계, 간통, 동성애, 소년애, 남색 등을 금지했으나, 사회 각층에서 이같은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성직자들과 수도사들 사이에 동성애가 빈번했다.
중세문학에 나타나는 귀족부인의 정부(情夫)는 언제나 사제로 등장하듯, 교회의 도덕적 타락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16세기 중용적 종교개혁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한 사제와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신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한 제사장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악이 중세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교황청 역시 탐욕으로 가득 찼다. 교황은 양떼를 돌보기보다 황금을 모았고,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교회당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일에 몰두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시기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교회의 본질보다는 예술과 사치를 즐겼다. 상인 로렌조 데 메디치의 아들인 레오 10세는 베드로대교회당을 완성하고자 자금 조달방법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
이처럼 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자 양식 있는 신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교황과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은 점차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급격한 변화를 원했다. 또 한편, 경건한 성직자들은 신앙문제에 대한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개혁운동
중세시대 교회개혁을 향한 갈망은 수세기에 걸쳐 나타났다. 1150년대의 왈도파는 교황보다 성경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단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위클리프, 후스, 롤라즈, 타볼파, 후스파, 자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개혁운동은 전통에 대한 성경의 우위를 천명하면서 진행됐다.
이러한 흐름은 경건에 대한 열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경건운동은 종교성과 도덕행위에만 역점을 두면서 ‘교황교회’의 사상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나, 칭의와 은혜의 교리를 가르치며 믿음의 대상이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강조했던 후대 종교개혁자들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신비주의가 나타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참회에 몰입하는 고행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위클리프는 당시 교회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며 교회와 수도원을 송두리째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당시 성찬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회의 화체설은 미신을 조장하며 성육신을 부인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혁신앙은 하층민의 환영을 받았다. 개혁신앙은 초기에 학자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수용되다가 점차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기존교회의 권위에 대치되는 사람들, 복음을 들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 앞에 95개의 반박문이 걸렸다. 면죄부를 팔고, 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황교회에 대해 청년 마틴 루터가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며 교회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그가 내건 반박문은 당시 교회제도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중 50조는 매우 직설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교황이 면죄부를 퍼뜨리는 자들의 강제 징수 행위를 알고 있다면 그는 성베드로 성당을 양떼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건축하느니 차라리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낫다고 배워야 한다.”고 밝혔다. 그 다음 조항에는 “사람들을 속여 돈을 뜯어내는 면죄부 판매자들”에 대해 언급하며 신학적으로도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제62조에서 그는 “교회의 참된 보화는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복음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렇게 1517년부터 1521년까지 루터는 종교개혁 신학의 5대 강령 중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3가지 기초를 제시했다. 이후 존 칼빈에 의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덧붙여졌다.
루터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통하고, 십자가에서 나오며,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급기야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최후의 결전이 진행된다. 루터를 고발한 이들은 루터에게 이전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당일 답변을 하지 못하고 변론을 미룬 루터는 다음날 이같이 담대하게 외쳤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입니다. 저는 어떤 말도 취소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종교개혁의 교훈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다시 형성하다, 새롭게 만들다, 되살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레포르모(reformo)에서 나온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 더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어 버린 것을 되살려냈다. 그들은 교회를 구체화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틀을 얻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초대 교부들 뿐아니라 성경과 사도 시대까지 되돌아봤다. 그래서 그들은 ‘개혁된 교회는 언제나 개혁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격언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개혁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다. 마틴 루터는 이 말을 수없이 했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복음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이 복음이라는 교회의 참된 보화를 은폐하고 성경에 없는 가르침과 관행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회 생활과 관행과 교리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며 종교개혁 신학의 5대 강령을 만들어 냈다.
▶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성경만이 생활과 경건의 모든 문제에 있어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다.
▶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와 솔라 피데(오직 믿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만 임한다.
▶ 솔루스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다른 중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