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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나의 웨딩드레스 “

남선숙 자매 (EBS 미주 책임주재원)
남선숙 자매  (EBS 미주 책임주재원)
남선숙 자매
(EBS 미주 책임주재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 여자가 내 팔을 강하게 끌며 이야기한다. ‘결혼하러 가셔야지요.’ 노처녀인 내게 복된 소식으로 들려야 할 이 말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누가 내 신랑인가? 난 하객도 초청하지 않았고…’ 난 말했다. ‘난 웨딩드레스도 없어요.’ 순간 장면이 바뀐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하얀 웨딩드레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꿈을 깨고도 당혹감은 가시지 않았다. ‘도적과 같이 임하시겠다는 주님이 빨리, 이리도 빨리 오신다는 것인가? 그런데 나는 웨딩드레스도 준비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인가? 더욱이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라고 고백하며 다녔지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감각이 내 실제가 되진 못했다는 자책이 나오는 것이다.
분명 내가 준비된 신부였다면 신랑을 맞는 그 날을 기대하며 준비했을 것이다. 웨딩드레스의 디자인을 고르고 오랜 고민 끝에 하나를 선택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사와서는 주름 있는 곳은 곱게 다림질하여 누가 만지지 못하게 소중하게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티도 주름도 점도 흠도 없는 거룩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또 그렇게 준비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수많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배웠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진리의 말씀이 감지되는 곳으로 발걸음 하여 마음을 다해 들었고 반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드러나는 것은 ‘여기고 드리고 계속 신뢰하는 것’에 실패하는, 믿음이 내게 실제가 되지 않는 나였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는 말이 계속 메아리로 울렸다. 며칠을 괴로워했다. 티도 주름도 점도 흠도 없는 웨딩드레스, 난 그것을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자였다. 구원의 믿음까지 위협을 당하며 나는 괴로워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부짖었다. ‘주님 살려 주세요. 주님 살려 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며칠 뒤 다시 꿈을 꾸었다. 기도도 성경말씀도 읽을 수 없었던 절망의 때, 꿈속에 주님이 계셨다. 그 주님이 갑자기 쪼개지셨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내게 마치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에게 입혀지는 철갑옷 로봇처럼 내게 입혀지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나를 덮어 오신 주님으로 인해 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빠져나갈 여지는 없었다. 주님으로 옷 입은 나.
나는 ‘주님으로 옷 입었다’는 말의 이미지를 오해하고 있었다. 내 손과 발, 머리카락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일상의 옷으로. 그래서 보여지는 나의 부분도 거룩하고 깨끗해야 하는, 내 편에서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온통 예수님에 싸여 나의 어떠함은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완전히 거룩한 주님만 나타났다.
며칠 후 말씀기도 시간에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 주님은 또 한 가지를 덧붙여 깨닫게 하셨다. 임금은 네거리 길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했다. 이 혼인 잔치에서 그 곳까지 은혜로 들어온 자가 내쫓김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옷이었다. 네거리 길에서 청함 받은 모든 자들이 이스라엘의 관례상 혼례의 주인이 마련해주는 이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는 주인이 준 예복을 입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옷으로 앉아 있었다. 왜? 아마 자신이 입고 있던 옷보다 이 예복이 볼 품 없다고 여겼거나 단지 내 옷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첫 번째 꿈, 땅에 떨어진 웨딩드레스가 생각났다. 난 그것이 입기 싫었다. 왜?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요. 내 정성으로 준비된 것이 아닌 것,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로 이미 모든 게 다 끝났다! 다 완성된 구원을 네 것으로 받기만 하라” 고. “앞으로의 너의 인생의 여정은 이 믿음을 더욱 믿음 되게 하고 은혜를 더욱 은혜로 드러내는 시간이 될 뿐이라” 고. 순간, 땅에 떨어진 웨딩드레스는 십자가와 오버랩 되었다.
그저 나의 할 수 없음과 무능력의 네거리 길에서 임금의 혼인 잔치로 옮겨진 것 뿐인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로 등장한다(계21:2). 그리고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초청된 거지인 나자신인 것을 발견하고 거지의 턱은 급기야 빠져 버린다. ‘은혜로다 은혜로다’
‘부끄러운 구원’이 어디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오직 구원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죄가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부끄러운 자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 앞에 한 없이 부끄러운 자이나, 이 부끄러움을 가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복, 나의 웨딩드레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부끄러움이 확 드러날 때 그 분으로 옷 입을 수 밖에 없는 필연성과 절박함이 확연해 진다. 나는 까닭 없는 주님의 이 십자가 사랑, 아들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계속해서 믿음에서 더욱 믿음으로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에 감사의 찬송으로 화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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