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열방은 난민문제로 뜨겁다. ‘에게해 난민서 침몰, 8명 사망’ ‘수단인 난민 15명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서 사살’. 하루가 멀다하고 난민 뉴스가 신문의 지면과 방송의 화면을 장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난민의 기원은 멀리 갈 것도 없이 100여년 전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구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이 땅을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했던 한민족은 시베리아로, 중국, 미주 대륙으로 세계 곳곳으로 내몰렸다. 카레이스키로, 조선족으로, 꼬레아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설움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뿐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애굽에 이른 아브라함. 고단한 삶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 이르렀다가 다시 그곳을 떠나야하는 나오미와 룻. 유대 땅을 떠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광야를 배회하던 다윗. 곤궁한 생활이나 전쟁이나 천재지변, 인종적, 사상적 원인의 망명자를 난민이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이들 모두가 난민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역사상 가장 완전한 충만과 은혜가 넘치는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곳을 떠나야 했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 그들도 기쁨의 동산 에덴을 떠나야 하는 최초의 난민 신세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경제개발의 기치 아래 산업화와 근대화 물결을 타고 세계 곳곳의 대도시는 농토를 버리고 대도시로 몰려드는 도시 난민들로 북적이고, 세계 곳곳의 지역 공동체는 범죄집단에 의해 가정파괴와 공동체 해체 등으로 발생하는 내국인 난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난민들에 대해 유럽은 그동안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난민 포용정책을 펴왔다. 그 대표주자로 독일은 지난 8월 시리아 난민들에 한해 더블린 조약의 적용을 유보하고 동유럽이나 남유럽을 거쳐 온 이들을 모두 독일에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지난 11월 10일 독일 내무부는 더블린 조약의 재적용 사실을 공개하고 무조건적인 난민 수용정책을 4개월 만에 폐기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13일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는 그나마 열려있는 서구의 포용정책에 쐐기를 박는 신호탄이 됐다. 테러범 중 두 명이 그리스 레로스 섬에서 난민 등록 후 프랑스로 입국했다는 것이 밝혀진 후 폴란드는 즉시 난민 수용을 중단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경계태세를 강화한 것이다.
휴머니즘, 즉 인도주의 입장에서 시작된 난민 수용은 이처럼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본질상 휴머니즘은 엄연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해보겠다는 시도는 인간의 이성과 사유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는데서 나온 행동이다.
구약시대 인간에 대한 평가는 단순 명쾌하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진정한 왕이 없던 사사시대에 내려진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어떤 인간의 노력과 시도로도 어떤 탁월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주의로도 난민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내가 기준이 되는 자기 소견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대립하는 한 모두가 만족할만한 난민문제 해법은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을 통해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 앞에 선다. 주님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인이 누가 될 것이냐고 묻는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인류 최고 최대의 난제 ‘난민’ 문제의 해답은 없다. [복음기도신문]
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