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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무시하지 말라

사진: Unsplash의 Aron Visuals

“죽기 30초 전.”

이것은 판타지 작가 브랜던 샌더슨이 피할 수 없는 일을 불길하게 예시하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 주는 불멸의 매력을 찾는 독자에게 이런 식의 표현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Stormlight Archive 시리즈에 매혹된 수백만 명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 영혼에 깊은 의미를 던진다.

나는 누구라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 직전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그 사람의 남은 수명에 대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정말로 기이하고 끔찍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과 맺으려는 관계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차원이 다른 긴급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그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별개로 지옥, 즉 악인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실제 장소가 무자비한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는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가?

선교사의 짐

아마도 선교사만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요삼 1:7) 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유일한 이름”(행 4:12)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이다(유 1:23).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부르심 뒤에 숨은 중심 동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즉시 인정한다. 선교사의 삶과 소명이 가진 부담은 지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내레이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봐서 잘 안다. 동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우리는 종종 먼 거리를 운전하며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 멈췄는지, 우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을 만났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자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막 죽었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봤을까? 최근에 내가 시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일까?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일까? 이것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처럼 내게 쏟아지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장막 바로 너머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한 번 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선교사가 받는 유혹

이런 부담과 함께 따라오는 유혹이 있다. 지옥의 교리를 잠시 제쳐두면 어떨까? 그건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한 저주는 불필요하며 성경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는 즉시 바로 사라지거나 지옥에서 잠시 고통은 받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없어진다는 영혼 소멸론(annihilationism)도 나름 좋은 방식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신자는 아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지옥을 제쳐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거기에 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남았다고 해도 부담은 없다. 영혼에 대한 긴급성은 함께 줄어든다. 한때 선교사를 감동시켰던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무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밤에 들리는 통곡 소리, 사방에 쌓인 장작더미, 죽음이 31초 남았던 이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부른 피로감 또는 문화 충격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에 관한 걱정과 부담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긴다”라고 표현한다. 밀라드 에릭슨이 관찰한 바와 같이,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며 종종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비신화화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는 그 주제가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고뇌를 고집해야 하는 걸까? 에릭슨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옥의 교리를 고려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옥의 교리를 포기한 선교사가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더 도덕적인 선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교리의 상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더 제한된 신앙과 협소한 사역이다.

선교사의 확신

성경 속 지옥에 관한 가장 분명한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관한 긴 설교를 한다. 물론 사역 내내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정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울며 이를 갈며”(마 24:51; 25:30)라는 문구를 반복한 후, 그는 그러한 고통이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 의로운 “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일 것이며, 저주받은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마25:33, 41). 이런 심판의 범위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46)라고 결론 내린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이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단지 한 장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며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않는 곳”(막 9:48)으로 묘사된 것을 본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눅 16:23-24). 요한계시록은 또한 끝없는 고통의 연기가 나고 유황이 많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9:1-2, 11; 14:9-11; 19:3; 21:8).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관해서 성경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카운트다운을 향한 위로

지옥에 관한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선교사는 이 교리가 가진 진리뿐 아니라 그 선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 교리의 어떤 점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교리가 영혼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가? 사역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가?

다음부터 밤에 통곡 소리가 들리거나 내레이터가 속삭일 때 이 교리가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유익을 기억하라.

3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민족 가운데 잃어버린 그의 친족을 생각하며 바울이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라고 썼을 때, 그가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사실이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면, 그분의 자비에 대한 말씀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의 신뢰성을 확신하는 것보다 선교사의 사역에 유익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고후 4:5).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기록된 말씀을 통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지옥의 짐이 엄습할 때, 선교사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라는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2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지옥 교리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인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건가?

선교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벌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악을 징벌하시고 악을 이기실 때 그의 공의와 의와 모든 대적을 이기시는 능력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겸손하게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며 공의로우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듣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음은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2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선교 현장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우리 팀장이 나를 산꼭대기의 탁 트인 전망 앞으로 데려갔다.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이 수 마일에 걸쳐 수천 개의 양철 지붕의 모습으로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뻔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오로지 나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절망에 빠져 그만두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당시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라는 바울의 선언을 접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혼의 선택이 나를 선교 현장에 머물게 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안식을 준다.

15초 전… 지옥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한다.

내가 말하는 안식은 선도 활동에서 한 발 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안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노력한다(히 4:11). 이것이 어쩌면 지옥 교리가 주는 가장 분명한 이로움일 수도 있다. 지옥이 실재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몇 초 후에 죽는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바울의 긴박감을 들어보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롬 10:14-15)

이 얼마나 대단한 동기 부여인가!

10 초 전…. 지옥은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숨이 막히게 한다.

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지옥 교리를 묵상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중요성과 분명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만은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 같이 하늘의 휘장이 열렸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여”(사 6:3, 계 4:8) 외치는 피조물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셨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는 하나님은 옳으시다.

의식적인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항상 생각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살후 1:9)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는 지옥에서(계 14:10) 영혼이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렇다. 지옥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척도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선교사도 얼마든지 감동에 차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소리쳐야 한다(시 99:9).

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한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은 힘들다. 수백만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인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는 것이다. 지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자비의 깊이에 대한 기념비도 제공한다.

감사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신다(요 15:11). 우리가 지옥(자비)을 피하고 영생(은혜)을 상속받도록, 실로 놀라운 사랑으로 선택되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을 주시는가.

결국, 선교사 자신도 몇 초 후면 죽는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언제 내가 죽을지 내 귀에 속삭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천국만이 있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의 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한다! [복음기도신문]

브래들리 벨(Bradley Bell) | 브래들리 벨은 전직 선교사이다. 지금​은 미국 루이빌의 Antioch Church의 담임 목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The Sending Church Defined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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