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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종말론, 시간의 이해

사진: NASA on unsplash

성경의 종말론(끝, 마지막 일에 관한 연구)은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분명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서 끌어내는 가장 복잡한 결과의 하나를 제시한다. 

종말론은 끝이자 시작이다. 발전에 관한 현대의 생각이지만, 가장 그렇지 않은 생각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이루어 낸 업적을 하찮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한다. 과거와 깨지지 않는 연속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급격한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종말론과 시간성(temporality)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복잡하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견해가 다 “마지막 것(들)”에 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로마의 원자론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세상은 붕괴하여 우주 먼지로 변하고 끝없는 순환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영원하다고 믿었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다양한 종말론이 있지만, 성경의 종말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시간의 형태

종말론은 성경의 이야기에 분명한 방향을 부여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의 지평에도 그렇게 한다. 종말론은 이러한 삶에 뚜렷한 의미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현재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시간이나 무한한 환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사전 연습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썼다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선과 같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누구도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

끝은 전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지막 장이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끝 장면이 없이 어떤 스토리의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끝이 없다면, “역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구름에서 패턴을 찾는 것과 같다”라고 존 레녹스는 말한다. 구름에서도 이런저런 형태 또는 얼룩을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려는 감각은 단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며 전날 저녁에 먹은 치즈의 영향에 불과하다. 

끝이 없이 불투명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존 리스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 나오는 구절을 이렇게 풀어썼다. 삶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서 땅 위의 평화를 찾는 단조롭고 쓸데없는 탐색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은 1970년대 코미디 쇼를 몇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해서 보면서 머리가 마비되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경험을 직접 했다는 것은 아니다.)

기계적 오류

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에는 결말이 있기에 역사에는 의미가 담긴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줄거리(플롯)로 거듭난다. C. S. 루이스가 말하듯이, 역사는 이제 “우주적인 이야기, 즉 다른 모든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줄거리”가 된다. 

헤르만 바빙크는 기계적 세계관에는 역사는 없고 단지 병렬(juxtaposition)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 사건들(Things)은 영원하고 연속적인 사건들(events)의 흐름 속에서 차례로 발생하는데, 그 사건들을 일관된 내러티브로 모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추정할 수 없다고 기계적 세계관은 말한다. 

이러한 기계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독교 시간관은 “만물의 발전과 온 세상에 관하여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시간이 지나오면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함께 모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엡 1:10).

루이스는 이러한 성경의 시간관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다. 그는 호메로스의 주요 서사시에는 “거대한 주제가 없으며, 애초에 있을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위대함은 어떤 사건이 역사에 심오하고 다소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때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라도 역사에는 패턴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패턴도 없는 고대 영웅의 시대에는 오로지 “목적 없이 이뤄지는 영광과 비참함의 끊임없는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승리, 패배, 잔치, 금식,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순간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서야 역사를 구체적이고 되돌릴 수 없으며 존엄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 

선형 연대기

선형 역사(linear history)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또한 선형 역사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통찰력 있게 끌어냈다. 이 히포의 주교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성경을 토대로 최초의 기독교 역사 철학(또는 기독교 신학)의 공식을 도출한다.

하나님의 도성이 서구 세계에 준 것은 시간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마이클 멘델슨(Michael Mendelson)에 따르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역사의 중요성은 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속적인 전체로 만드는 순환 패턴에 있었다. 따라서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고 공통적인 사건을 강조했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를 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 사건이 단일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미래에도 반복될 사건의 패턴”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역사는 “반복될 수 없는 일련의 도덕적으로 결정적인 사건들의 극적인 전개”였다는 게 멘델슨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성경의 역사관에서 순환성의 여지를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니다. 바벨탑은 아담의 죄를 반영하고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출애굽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 모든 사건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단 하나의 시작과 단 하나의 끝으로 펼쳐지는 단 하나의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만 발생한다. 절대로 같은 사건이 다시 생기지는 않는다. 

오로지 시작

자, 이게 우리가 아는 역사이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다. 

다만, 그렇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있다(계 1:18). 우리는 “영원무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계 7:12).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온다”(계 14:11). 하나님의 메시아는 “영원히” 다스리신다(계 11:15). 멸망된 바벨론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간다”(계 19:3).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다(계 20:10).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이다(계 22:5).

이 영광스러운 후렴이 들려주는 커다란 북소리는 다른 그 어떤 구절보다도 종말적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니아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최후의 전투에서 C. S. 루이스의 주인공들은 과수원이 있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산과 “영원히 솟아오르는” 폭포를 생각한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이제 그들은 지구상의 누구도 읽지 못한 위대한 이야기의 제1장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되며 모든 장은 이전의 것보다 낫다.” 파루시아는 기독교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파루시아는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가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명령이다.

종말은 결코 끝없는 정체도, 무의미한 병치도 아니다.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Eschatology Makes Sense of Time 

크리스 왓킨 Chris Watkin | Monash University의 인문학부 교수이며 Biblical Critical Theory 등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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