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치료받을 권리 “한센인 전문 병원 건립” 요청
복지부, 요양 병원 건립에 소극적…”검토중”
편집자 주 = 평생을 '문둥이'로 천시받으며 사회와 격리된 채 '없는 사람처럼' 숨어서 살아온 나환자(한센인)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지만, 그들을 반기는 곳은 없다. 이들을 받아주는 의료기관과 요양시설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조직이 괴사해 손가락이나 코가 뭉툭하고 눈동자가 빨개지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천형·天刑)'로 받아들이며 온갖 냉대와 차별, 사회적 낙인을 견디며 살아온 한센인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이다. 완치됐음에도 '병이 옮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탓에 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정착촌에서 제대로 치료도, 요양도 받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는 이들의 치료받을 권리와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전국 최대 규모의 한센인 정착촌인 전북 익산시 왕궁지역의 의료 실상과 대안 등을 3편으로 나눠 송고한다.
“고통과 알약 사이에서 유지되는 우리네 삶이 그저 무기력할 뿐입니다. 사람이기에 요구하는 것이지요, 치료받을 권리를 달라고…”
이정순(82·가명)씨는 부엌일을 하다가도 동네 마실을 가다가도 여기저기에 찧거나 넘어진다.
몸 여기저기에 멍자국과 딱쟁이가 그칠 날이 없다.
피부와 신경계의 증상으로 고통받는 한센인들은 손이나 다리 감각이 무뎌져 종종 가구 같은 물건이나 모서리에 부딪혀 늘 상처를 달고 산다.
혼자 사는 최수영(86·가명)씨는 목 경직, 경련, 마비 등 신경계 합병증으로 치료와 요양이 필요하지만, 종일 방안에 갇혀 지낸다.
평균 나이 80세, 장애등급자 75%인 이 지역 한센인들은 작은 상처뿐 아니라 당뇨나 치매 등 각종 성인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오랜 편견과 차별로 일반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전문 치료 및 재활서비스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한센인들의 ‘치료받을 권리’ 요구에 익산시는 최근 국립요양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 연구용역 결과 비용 대비 편익(B/C)이 1.29로 경제적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센인 전문 요양병원 건립은 150병상 기준 건립비 130여억원의 사업 규모로 순현재가치(NPV)가 188억원에 달해 통상 비용 대비 편익(B/C) 평가가 1을 넘어 경제성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됐다.
시 관계자는 “한센인은 아직도 차별과 편견 탓에 치료조차 어렵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전문적 치료·요양시설이 절실하다”며 “이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에 국립 한센인 요양병원 건립 필요성과 당위성을 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센인들의 염원과 익산시의 연구 용역 결과에도 보건복지부는 미온적이다.
한센인들의 평균 연령이 80세 정도로 고령인 상황에서 전문병원을 운영하면 이후 공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특정 질병에 대한 공공병원 건립 사례가 없는 것도 보건복지부가 국립 한센인 요양병원 건립을 꺼리는 원인으로 꼽힌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한센인들도 일반 병원에서 (일반인처럼) 치료받는 것으로 안다”면서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쫓겨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립 한센인 전문 요양병원 건립 계획에 대해 “검토 중이며 연구 용역 등을 거쳐야 하므로 그 결정은 오래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부의 공실 문제 우려에 대해 익산시는 “고령 한센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요양병원을 찾는 수요가 없어지면 고령화 시대에 대비한 일반 요양병원이나 치매안심병원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한센인 요양병원은 요양의 장소이자 동시에 생활의 장소인 만큼 이들의 인권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익산시는 한센인 요양병원이 건립돼 이들이 입원진료를 받게 되면 교통비·이동 소요 시간·보호자의 시간 절감은 물론 삶의 질 개선 등 다양한 편익이 뒤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시 관계자는 “특히 왕궁면 구덕리에 시 소유 부지가 있는 만큼 정부가 130억원가량의 건립비를 들여 150병상의 요양병원을 건립하면 2039년까지 유휴 병상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며 병원 건립에 따른 경제성을 강조했다.
이들을 위한 병원은 과거에는 존재했었다.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왕궁으로 이전이 시작된 1940년대 ‘소생원’이라는 병원이 마을에 설립됐고 이후 1960년 1월 국립익산병원으로 개칭되어 소록도와 동등한 위상을 얻으며 이들을 돌봤다.
이후 치료 진전 등으로 양성 환자 수가 점차 감소하자 정부는 1968년 이곳에 있던 280명을 국립나병원으로 이송하고 국립익산병원을 폐쇄했다.
이들이 맘 놓고 치료받을 수 있는 전문병원이 오히려 복지개념이 희박했던 60여년 전에 것과 비교하면 한걸음 후퇴한 셈이다.
현재 이들은 한국한센복지협회에서 연계한 민간병원 방문 치료나 이동 진료 등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여론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왕궁지역 한센인 99.2%가 이동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지만 이 가운데 96.5%는 의료서비스가 충분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익산의 한 종합병원 의사는 “한센은 흔히 알려진 전염병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병원에서는 적절한 치료 방법을 모를 수 있다”며 “한센 환자 치료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며 이를 제공하는 요양병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부 보조금으로 빠듯하게 생활하는 이들에게 병원 이용 비용은 또 다른 부담이다.
왕궁지역 한센인의 98.5%는 피부질환을 비롯해 고혈압, 당뇨병, 안질환, 심장질환, 뇌혈관 질환 등으로 1인 연평균 100회 이상 병원을 찾고 있다.
주로 전동휠체어로 생활하는 이들은 택시를 이용하는데, 인근 병원 이용 시 1회 평균 교통비로 1만6천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 연간 160만을 순수 교통비로 지출한다.
최씨는 “전국적으로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은 거리가 먼 경기·전남·대구 등 3개 시도에 있다”면서 “노동력이 없는 이곳 주민 90%가량이 생계급여 등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하는 데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를 오가며 치료받는다는 것은 경제적·육체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마을 회장 박씨는 “한센인을 위해 각 지역에 13개의 국립요양소를 운영하는 일본은 물론 필리핀, 브라질 등 저개발 국가들이 국립요양병원을 운영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한센인을 대상으로 하는 요양병원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치료와 생활시설을 갖춘 요양병원 건립을 절실히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모든 인간은 질병에 걸릴 수 있으며 평등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겠지요. 사회적 지위랄 것도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우리에게 병원 문턱은 너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맘 놓고 갈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라며 한숨지었다.
“그래야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살아 나가는 일이 의미 있을 것”이라며 하늘이 내린 질병의 고통 한가운데서 ‘슬픈 분노’를 삼키는 듯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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